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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 3人의 시각 _ CROSS OVER 展 Review
2012-06-07 (목) 18:45 조회 : 3482



CROSS OVER_영역을 넘어 확장으로 展 Review

3人의 시각

* 「CROSS •OVER」 전은 2012년 4월 7일부터 5월 2일까지 밀알미술관에서 십자가를 소재로 하여 58인의 도자, 유리 작가가 참여한 기획전시이다. 3인(감상자, 평론가, 전시기획자)의 리뷰를 통해서 전시에 대한 다른 시각과 다양한 해석이 있음을 짚어보고자 한다.




제 1편. 전시기획자의 리뷰 – 홍익대학교 도예연구소 연구원 전지나





십자가(CROSS)를 소재로 하는 이번 전시는 두 가지의 기획의도를 가지고 있다. 첫째는 ‘예술과 종교의 만남’으로 도자예술의 영역을 확장을 꾀하였고, 둘째로는 ‘소통’이었다. 다양함이 넘쳐 주제나 작품의 질료적 성격도 파악하기 힘든 혼재한 현대미술 속에서 일반대중(관람객)들은 소외당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친숙한 십자가의 이미지를 통해 일반대중들과 소통을 시도하고자 하였다.
 이 글은 진행자의 관점에서 기획의도에 얼마만큼 부합되는 전시였는가를 피드백해보고 전시준비부터 마무리까지의 기간 동안에 현장에서 배우고 느꼈던 점에 대한 내용을 담고자 한다.


예술과 종교의 만남- 도자영역의 확장

역사적으로 예술과 종교는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최초의 예술품은 종교적인 의례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며 종교화는 회화발전에 있어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미술의 입장에서 종교의 내용들은 영감과 상상력을 제공해 주는 것이었다. 물론 종교가 미술을 예속하는 부분도 있었지만, 서로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르네상스 이후 본격적으로 인간에 대한 탐구가 이루어지며 그 관계는 미약해졌고, 근대 이후 인간중심의 다양한 문화들이 성장하며 예술과 종교의 관계는 더 멀어지게 되었다. 십자가의 종교적인 소재에서 상상력을 얻어, 다양한 상징성과 조형성을 도자의 표현력과 내, 외재적인 실험을 토대로 도자예술의 영역을 한층 넓히기 위해 기획되었다.
 특히 이번 전시의 작품선정방식은 출품작가에게 동일소재(십자가)를 제시하여서 작가의 다양한 해석과 작품제작을 요하였다. 고로 이번전시는 작가들이 어떻게 재해석하고 풀어내었느냐가 관건인 전시라 할 수 있겠다. 작가들은 십자가의 역사적, 종교적, 조형적인 면에서 각기 다른 해석들을 보여주었는데 그 중 출품작 성향에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보았다.

1) 조형적 실험

십자가는 기호로서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매우 모던한 형태이다. 부분의 작가들을 십자가의 형태를 변형, 자신만의 스타일로 재현하였으며 다채로운 십자가형상의 작품이 다수 출품되었다.
몇몇 작품을 소개하자면, 윤영수의 작품은 십자를 기호 그 자체로 해석하여 +,o의 기호가 조합된 형태를 만들었다. 이 오브제들의 그림자에서 십자의 형태가 다시 나타나고 있으며, 러시아인형 마트로시카의 구조를 차용해 연속성을 나타낸다. 강은영의 작품은 집의 기본 구조를 조합하여 십자를 만들어 내었으며, 김현숙의 작품은 십자가 가진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종교(십자가)의 권위적 상징으로 재해석 하였다.


 

김현숙 作




윤영수 作


(2)내적의미부여, 재해석
작가들은 자신의 종교적 믿음을 작품에 투영하기도 하였고, 작품의 기능 중 비판적인 내용의 작품들도 있었다. 감상자로 하여금 마음 포근해 지는 작품들이 있었고, 십자가를 통해 현 종교의 비판적 시각이나 자신의 고통에 대해 표현한 작품들이다.
 고성희의 작품은 파란색 조명 십자가이다. 교회에서 봄 직한 세련된 형태의 십자가 금속 틀에 잘린 유리봉들이 박혀있다. 마치 네온사인 간판 같은 파란색 불빛이 점멸하는 것은 현대의 환경 속에서 표식에 불과한 신성성을 잃은 십자가를 보는 듯하다. 박정근의 작품은 종교에 대한 현대인의 태도와 부조리를 인류최고의 베스트셀러 성경책을 소재로 하여 역설하고 있다.
 



고성희 作


소통 (communication)

현대미술에서 다양한 형태의 소재와 주제들이 등장하였다.
다양한 전시들을 통해 작가들은 사회비판이나 구체적 삶에 현실 등을 작품에 이입하였고 그 안에서 타자를 대변하거나 주가 되기도 한다. 허나, 정작 예술을 향유하는 관람자의 위상은 여전히 고려되지 않았고, 타자로 남아있다.
 전시의 본질은 관람자와 작품(작가)와의 소통과 교감이며, 이는 작품을 통해 작가로부터 관람자에게 무언가가 전달된다는 의미이다. ‘소통’에 대한 다양한 의미가 상용되어지고 있지만 종합해보면 인간상호관계를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 자신의 감정과 생각, 사실, 의견 등을 여러 가지 상징을 통해 타인에게 전달하고 수신하여 서로 공통된 의미를 수립하고, 더 아나가 서로의 영향을 미치는 과정 및 행동이라 할 수 있다. 허나 많은 전시들이 관람객에게 일방적, 소극적 소통을 해왔다. 최근 전시에 대한 연구가 지속, 발전하면서 상호작용적 소통에 대한 목소리가 높다. 이는 전시에 대한 정보의 내용을 효과적 전달하며 관람객들의 피드백을 통해 전시를 구성해야한다는 것이다. 즉 전시는 관람객과의 상호작용을 발생시키고 전달하는 일종의 매체이며, 이는 메시지의 전달과 의미의 생산과 교환을 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CROSS•OVER」전의 경우 소통이 원활히 되었는가에 대한 대답은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아쉬움라고 생각한다. 매주 2~3회 이상 전시장에 있으면서 일반대중과의 소통을 시도하였고 전시기간 약 한 달 동안 일간 평균 100명이 다녀갔다. 초반 전시 관람객은 대부분 미술관계자, 작가나 작품에 대한 이해가 있는 관람객이 대부분이었으나 점차 주 관람객 은 도자에 지식이 거의 없는 일반인, 종교인, 지체장애인, 노인, 어린이 등 층으로 넓어졌다. 전문 박물관 미술관이 아닌 대관형식의 전시라는 것과 접근성이 떨어지는 장소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성공적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고무적인 것은 일반관객들에게서 다양한 이야기를 끌어냈다는 점이다. 아마도 십자가라는 친숙한 형태와 기본적 종교에 대한 지식에서 오는 공감대가 안도감을 느끼게 했던 것 같다. 관람 시 몰입도가 높았고 거리낌 없이 느낌과 생각을 서로 공유하였으며, 나아가 의미해석자, 평론가적 면모를 보이는 관객들도 있었다. 그 중에는 작가, 기획자도 생각하지 못한 날카롭고도 훌륭한(?) 이야기들도 있었다.
 아쉬움으로 남는 점은 그동안의 소통의 부족에서 오는 것들이었다. 예를 들어 재료가 무엇인지를 가장 많이 물어왔는데, ‘도자, 유리’라고 대답하면 제일먼저 똑똑 두들겨 보는 전시에티켓에 반하는 행동을 서슴없이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작품은 어디에 쓸모가 있나요?’ ‘왜 공예작품이 벽에 붙어있나요?’등을 물어왔을 때 일반대중이 가지고 있는 도자에 대한 고정관념과 부족한 이해는 생각하는 것보다 격차가 크다는 것을 느꼈다.
전시는 작품과 그 자체의 내재적인 가치만으로 완성된다고 할 수 없다. 관객의 체험과 반응을 통해 그 의미와 가치가 진정성을 갖게 된다. 양자 간에 어떠한 작용이 일어나는가?, 그리고 효과적인 상호작용을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다시금 던질 필요성이 있다.
 도자전시의 특징인 질료적 성격을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보완하기위해 관람객의 선- 이해를 효과적으로 하게 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고 작가와 기획자간의 심도 있는 소통, 전시를 보는 다양한 관점을 키우고, 무엇보다 자신의 역할에 충실히 한다면 내실 있는 전시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아가 어느 장르보다 향유할 수 있는 관람객 층이 넓어 질 것이다.






제 2편. 평론가의 리뷰 – 도화진




신과 인간, 이어주는 매개물
 자비에 보브와(Xavier Beauvois) 감독의 ‘신과 인간(Of Gods And Men, 2010)’이라는 영화는 알제리 산골 수도원과 인근 마을을 배경으로 신과 인간 사이에서 숭고한 신념을 지켜가는 수도사들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어느날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마을이 위기에 처하면서 수도사들은 자신들의 안위와 종교적 신념 사이에서 선택의 순간을 맞이한다.
 그들은 약해져가는 심령을 서로 어루만지면서 매일 밤 마음의 번뇌와 갈등, 두려움을 머리맡에 걸린 십자가에 의지하며 버텨내고 있다. 그런데 그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물(聖物)로서의 황금 십자가와는 달랐다. 그것은 허드레 나무가 투박스럽게 십자 모양으로 교차되어 있었는데 그 속에는 단조롭지만 고단한 일상이 녹아져 있으며, 그들의 노동과 거친 손을 닮아 있었다. 공동체 노동 속에서 수집된 나무 조각들은 단순하지만 강력한 조형성을 갖게 되어 고귀한 쓸모를 찾았을 뿐만 아니라 신념을 투사하는 매개물로 확대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마음을 기대는 지속적인 행위로 인해 한낱 사물은 영적인 대상, 심령의 산물로 새로운 쓰임새를 가지게 되었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십자가의 의미를 끌어내는 데에는 분명 한계가 있음을 인지하지만 삶의 양식과 필요가 의도되지 않은 공예를 구현하기도 하며, 종교적 성물 역시 전문 제작자뿐만 아니라 이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직접 만들어 성스럽게 소비할 수 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오늘의 십자가, 그 쓰임

그렇다면 오늘날 ‘십자가’의 쓰임새는 어떠한가. 십자 모양의 조형물은 전에 없는 많은 의미와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그만큼 다양하게 응용되고 있다. 그것은 죽은 이의 무덤에 놓여 천국에서의 부활과 안녕을 의미하고, 한 가정의 한쪽 벽면에 걸려 신앙과 규범을 상징하고, 동네어귀 교회 첨탑 꼭대기에 빛나며 현대교회를 표상하고 있다. 때로는 장신구로서 우리 목에 걸리기도 하고, 반종교적인 활동을 위해 변형되기도 한다.
 오늘날 십자가는 종교에서 가지는 절대적인 의미를 상징하는 동시에 두 획이 교차된 조형의 하나이자 거리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아이콘이 되었다. 우리는 엄숙한 예배당 내부에 걸린 십자가에서 숙연해지거나 경건함을 느끼고, 교회지붕 가장 높은 곳에 홀로 빛나는 네온사인 십자가에서는 왠지 모를 키치적인 것을 경험하게 된다. 이렇듯 십자가는 신과 인간, 의식과 무의식, 삶과 죽음, 빛과 어두움 등 수많은 양극적인 요소를 이어주는 종교적 속성을 내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대표적인 상징적 요소이자 기능적인 아이템로 ‘활용’되고 있다.
 영화에서처럼 십자가는 경건한 믿음과 종교적 신념을 상징했고,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과정과 의미가 중첩되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가진 십자가는 개인적 소망이 가득하고, 그 바람을 적절히 투사하는 ‘매개물’로 쓰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종교인을 포함한 많은 수의 현대인들이 이런 절차에 익숙해지고 학습되어 또 다른 우상(idol)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곳에서의 십자가, “cross-over”

이번 전시에 참여한 60명의 작가들은 십자가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을까. 복잡하게 얽혀있는 의미들 안에서 종교를 예술화한다는 것, 전혀 다른 차원의 것들에서 적절한 타협점을 발견하고 이를 유연하게 표현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번 전시는 십자가의 형상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며 자신의 종교적 신념과 소명을 표현한 작업들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형태를 넘어 신앙이라는 것과 참의미에 대해서 깊게 고민한 작업들도 보인다.
 많은 작품들은 성물로서의 십자가에 접근하고 있으며, 강력한 조형성과 다채로운 공예기법을 바탕으로 십자가를 표현하여 관람객의 시선과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특히 김준용은 유리속에서 반사되는 네 개의 십자가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으며, 권오훈 작가의 “빛”은 단단하고 무거운 덩어리 속 이편과 저편을 나누는 것과 같은 십자가 문의 형상을 만들었다. 이러한 작품들은 십자가 형상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거나 작품의 일부분으로 만들어 관람객으로 하여금 희망하는 것을 보게한다.
 반면 몇몇 작품에서는 성도들의 내면에 접근하고 재해석하여 의미적 차원으로서의 십자가를 표현하고 있다. 이인진 작가의 작품은 십자 모양의 익살스러운 이목구비를 가진 얼굴 형상의 도자들이 모여 있다. 이는 신앙과 교회가 사람들의 모둠과 서로간의 관계, 그리고 그 안에서 공유되는 ‘나눔의 십자가’로 인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소영 작가 역시 둥글게 손을 잡고 앉아서 중앙의 빈 곳을 응시하는 토끼들의 모둠을 만들었다. 현대사회의 연약한 인간들이 신앙 안에서 서로를 의지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그 공동의 믿음은 만져질 수는 없지만 ‘견고한 십자가’를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이번 전시에서 관람객들은 무언의 공감대 아래 두 선의 익숙한 만남 또는 충돌을 찾아다니며, 그것이 친절하게 구현된 작품에서 안도감을 느낄 것이다. 신앙과 예술적 표현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발견한 작가에게 대화를 걸고, 십자가 형상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관람객은 작가의 신앙을 추측해보기도 할 것이다.
 흙과 유리는 정교하고 엄숙하게 다루어졌다. 흙과 유리는 재료로서 형태를 만드는데 자유로운 반면 끈질긴 인내가 소요되며 시간의 제한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물성 아래 작가들은 다양한 기법을 사용하여 십자가의 형태를 조합했다.
 그들은 오랜 가공 과정에서 개인적인 십자가를 경험했을 것이며 분명, 그 시간 속에서 개인적인 바람과 소망을 담았을 것이다. 그래서 ‘도예’는 십자가를 닮았다. 불로 단단해져가는 흙의 성질과 명상과도 같은 작업 자체가 십자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김준용 作




이인진 作




이소영 作



 3편. 평론가의 리뷰 – 홍익대학교 강사 최윤정




cross over_형태와 의미의 변주(變奏)

“영역을 넘어 확장으로”란 부제를 지닌 <CROSS․OVER>전은 십자가를 주제로 작가와 관람객이 공감대를 형성하고, 본래의 이미지를 넘어 예술의 영역을 확장하고자 기획된 전시이다. 예술이 종교와 만나 서로 영감을 주고받아 더 큰 상승효과를 만들어 내기를 기대한 전시라 하겠다. 종교적인 주제를 다룬 예술품의 제작은 오랜 역사를 지닌다. 하지만 재료와 관념의 세계를 탐닉하는 현대 미술에서 종교적 주제는 점차 소외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이런 때에 십자가를 테마로 한 전시란 무모하고도 용감한 도전으로 비춰졌다.
  60명의 작가들이 흙과 유리를 재료로 각자가 해석한 십자가를 풀어 놓은 전시는 관람객을 적잖이 당혹스럽게 한다. 전시장은 수많은 개념과 다양한 해석들로 뒤얽혀서, 마치 관현악단이 일제히 악기를 조율하는 듯 소음이 머릿속을 온통 흔들었다. 전시장을 천천히 오가며 얼마간 시간을 보내자 비로소 작품이 보이기 시작했다. 작가들은 십자가의 개념을 다양하게 변주(變奏)하며 작품으로 구현해 놓았고, 각각의 해석들은 종횡으로 교차하며 또 하나의 거대한 개념적 십자가를 형성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수많은 선들이 작품 사이에서 엇갈리는 동시에 제각기 관람객과의 소통으로 이어져 다른 층위의 개념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수많은 엇갈림(“크로스 오버”)이 전시장을 들어 선 순간 한꺼번에 다가오기 때문에 한동안은 그저 우두커니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작가들의 변주는 관람객과 만나면서 비로소 생명을 얻는다. 작가들은 십자가라는 주제를 바탕으로 재료․형태․색․질감․의미 등을 여러 가지로 변형하여 연주하고 있다. 관람객의 감상(鑑賞)은 변이(變異)된 개념이 다양한 만큼 수치로 환산할 수 없는 무한대의 교차를 발생시킨다. 한 명의 작가가 해석한 십자가는 관람자의 관점(觀點)과 교차하면서 새로운 '개념의 십자가'로 만들어진다. 나아가 관람자는 전시된 모든 작품과 새로운 '개념의 십자가'를 형성한다. 관람자가 늘어나면, '개념의 십자가'도 작품의 수를 곱한 만큼 많아진다. 하지만 관람자는 앞서 본 작품이나 다른 사람의 영향도 받기 때문에 사실상 샐 수 없이 증가한다 하겠다.
 
  '개념의 십자가'는 그 속에 전체와 닮은 모습의 무수히 많은 십자가를 가지고 있다. 해석과 의미는 서로 뒤섞여 혼란스러운 모습이지만 나름의 질서가 있으며, 계속 반복해서 만들어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개념의 십자가'는 자신과 유사한 형태를 끊임없이 만들어가는 프랙탈(fractal)과 서로 닮았다. '개념의 십자가'는 만들어진 과정은 서로 동일하지만 그 내용은 모두 다르며, 고정된 정의(定義)로서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의미가 부여되는 동적인 상황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서 십자가라는 테마(Thema)가 종교적인 범위를 넘어서 현대미술로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전시는 '개념의 십자가'를 발견해 내는 만큼이나 “CROSS OVER”의 중의적(重義的)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도 흥미롭다. 기획자는 예술과 종교라는 두 장르의 결합을 “크로스 오버”로 규정하며 전시를 열고 있다. 이 때 십자가는 본래의 종교적 상징에 예술적 해석이 더해지면서 서로 “크로스 오버”되는 것이다. 작가들이 부여한 '개념의 십자가'는 인간의 죄를 대신한 거대한 '사랑'이거나 인간의 한계에 대한 '자기반성'이며, 희생을 통한 '구원'과 이에 대한 '감사'이기도 하다. 관람객은 십자가를 통해 예수를 보며, 작가들이 부여한 '개념의 십자가'를 읽어 본다. 이렇게 신(神)과 인간은 십자가를 매개로 만나게 되고, 종교와 예술은 작가적 해석을 매개로 “크로스 오버” 된다.    
십자가는 수직과 수평이 교차하는 형태를 기본으로 한다. 기독교에서 십자가는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공의(公義)’와 인간의 죄를 용서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만나는 자리이다. 공존할 수 없는 두 개념이 한 자리에서 교차하는 것이다-“크로스 오버”-.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십자가에서 죄를 미워하는 하나님의 공의와 죄를 용서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동시에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는 예수와 기독교인의 삶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곳에서 자신을 내어주어 인간을 생명에 이르게 한 점에서는 예수의 삶을 의미하며, 하나님에 대한 사랑(縱)과 이웃 사랑(橫)을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는 점에서는 기독교인의 삶을 상징한다. 결국 기독교에서 십자가는 성경의 모든 개념이 만나는 자리라 할 수 있다.





작가들은 십자가의 기본적인 형태와 종교적인 의미에 재료의 “크로스 오버”를 더한다. 백토는 조합토 혹은 석기질의 점토와 함께 사용되며, 나무는 점토와 금속을, 유리는 스텐레스 스틸 등의 재료와 한 작품 안에서 교차된다. 이질적인 재료의 만남은 십자가의 상징적 의미와는 별개로 미적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십자가라는 형태 자체가 “크로스 오버”이기도 하지만 작가에 따라 전형적인 교차형을 벗어난 마주침을 계획하기도 한다. 빛이 이용되기도 하고, 색채나 질감의 대비가 동원되기도 하며, 전혀 다른 형태와 의미의 조합이 미묘한 뉘앙스(nuance)의 엇갈림을 만들어 낸다. 작가들에게 선택된 이런 도구들은 사랑과 용서, 안식처와 기도, 치유와 회개의 눈물 같은 키워드가 되어 다시 한 번 의미의 교차를 형성한다.
 
문화나 음악 등이 다른 유형으로 바뀌어 가는 것을 “크로스 오버”라 표현한다면, 십자가는 그 자체의 종교적 상징도 이미 “크로스 오버” 된 것이다. 고대 책형(磔刑)을 위한 죽음의 도구가 그리스도 사후 인류의 구원을 상징하는 상징물로 의미가 바뀌게 된다. 죽음의 상징에서 죽음을 넘어 부활한 예수의 생명을 상징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크로스 오버”된 십자가는 작가의 개념과 관람자의 관점이라는 필터를 거치면서 처음 출발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재탄생된다. 여러 단계, 다양한 층위의 “크로스 오버”는 십자가를 종교적 상징을 넘어 새로운 차원의 개념으로 전환시키는 역할을 한다.
 한편 이 전시에서 “크로스 오버”는 '건너다'라는 의미 코드로 해석될 수도 있다. '건너다'라는 행위는 종교에서 종종 긍정적인 변화의 의미로 사용된다. 길을 건너거나 강을 건넌다는 행위는 내가 속한 익숙한 세계에서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현재의 세계를 벗어나는 행위를 통해 역설적이지만 인간은 진정한 자기성찰에 이를 수 있는 경우가 많다. '건너다'라는 개념은 새로운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출발이자, 현재의 자신을 냉철하게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관람객은 작품을 통해 십자가의 새로운 의미에 도달할 수도 있으며, 십자가에 투영된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기도 한다. 이런 면에서 관람객과 작품 사이의 소통은 철저히 관람객의 관점에서 재조정된다 하겠다.
 
십자가는 가로와 세로가 만나는 형태이다. 십자가는 성경의 모든 개념이 만나는 종교적인 자리이며, 동시에 작가적 변주가 이루어지는 해석의 장(場)이기도 하다. 작가의 생각과 손을 거친 십자가는 관람자의 시선을 통해 재해석된다. 가로와 세로, 종교와 예술, 예술품과 해석이 엇갈리면서 거대한 '개념의 십자가'는 만들어진다. 종교와 예술의 만남("크로스 오버")은 십자가의 의미를 변화시키며("크로스 오버"), 엇갈림의 중심에 관람자가 서 있다. 관람자의 시선은 다층적인 '개념의 십자가'를 계속해서 자아내며("크로스 오버"), 찰나(刹那)에 의미가 부여되고 변화되어 간다("크로스 오버"). 관람자에게 십자가는 더 이상 종교적인 상징물로 머무르지 않는다. 끊임없이 변주할 수 있는 테마곡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