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

소식

게시글 검색
<>
[해외] 어느 젊은 작가의 죽음
2005-05-11 (수) 14:30 조회 : 5109

학예원의 일상은 분명히 지루하지 않다.
페인트를 칠하거나 공모전의 무대 뒷일 등, 화려한 것은 아니지만 활기찬 매일임에는 틀림없다.

지난번의 소식을 전하고 1개월이 지나버렸다.
일본에는 4월부터 새로운 년도가 시작되어 분주한 나날들이 이어진다.
실은 그 사이, 아이치엑스포(愛知EXPO)에도 갔었고, 현재 개최되고 있는 경기도 세계도자비엔날레도 볼 수 있었다. 보고하고 싶은 것이 참 많다.
그러나 한가지 안타까운 보고를 해야만 한다.
그것도 학예원의 일상.

어느 날, 낮에 일을 마치고, 신칸센을 타고 오사카에.
한 젊은 작가의 죽음과 마주하게 되었다.
작가의 이름은 니시다 준.


2001년 제1회 세계도자비엔날레 조형부문에서 동상을 수상,
2002년 제6회 미노국제도자기전 도예부문 그랑프리,
2003년 제53회 파엔차 국제현대도예콩쿨에서 그랑프리,
2004년 제1회 대만국제도예비엔날레에서 심사위원상,
이처럼 잇따라 세계적 규모의 공모전에 입상,

일거에 상을 휩쓸고 있었다. 세계가 주목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니시다는 대학원을 막 졸업한 장난꾸러기 소년의 풍모를 가진 젊은이였다.
교토세이카대학 대학원을 졸업해서 같은 학교 조교가 되었다.

그는 작품의 대부분을 대학의 실습실에서 제작하고 있었다.
학교의 실습실은 그의 작품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해도 좋다.
조수였던 것은 니시다 쪽이었지만 현장에서는 대학이, 학생이 니시다의 조수가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확실히 주변에는 “곤란했었어..“라고 말했던 사건은 많았던 것 같다.
그러나 학생을 서포트 해야만 하는 그를 대학이 묵인하고 있었던 것은 그를 서포트하고 있었다고도 바꾸어 말할 수 있다.
학생들도 대다수가 그의 일을 도와주었다. 서포트한 것이다.
무엇이 그렇게 하게 한 것인가. 허락했던 것인가.


그의 제작은 이른바 도예제작의 논리에서 일탈한 것이다.
라기보다는 무시하고 있다. 아니, 무관심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도자기의 가운데는 비어있고, 흙은 같은 두께로 겹쳐져 쌓여 간다.
소성해도 “깨지지 않도록” 궁리한다. 그것이 도예제작의 기술이라고도 불려지는 것이다.
도예가가 성형한 흙의 조형을 가마에 넣어서 소성한다. 그 소성 중, 가마 안에서 조형의 변화를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누구라도 한번은 들여다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가마의 온도는 조금씩 올라간다. 수치로 그 온도를 파악하고 있어도
가마 안에서의 흙 소재의 변화, 조형의 변화를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니시다는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흙을 물레에 놓고 대형 항아리(甕)를 성형한다. 유약의 원료를 분말 그대로 넣는다. 거기에 조형된 자토(磁土)를 섞어 넣는다. 소성되면 유약은 녹고, 섞여서 보이지 않았던 자토가 얼굴을 내민다. 항아리의 안에는 소위 무구한 상태이기 때문에 중심부분은 바깥쪽의 온도에 다다르지 않는다. 가마에서 꺼내진 대형 항아리를 깨서 보면 중심부분의 유약은 녹아 있지 않고, 분말 그대로 없어져버렸다. 보통 온도가 전체에 널리 퍼지도록 모든 두께가 일정하게, 속이 비도록 제작된다. 무구하게 구워진 니시다의 작품은 어디를 잘라내어도 소성온도가 다르고, 소재의 다양한 표정이 나타난다. 하나의 가마에서 동시에 일어난 온도의 차이는 소재를 다이나믹하게 변모시켰다. 가마 안에서 변모하는 소재의 싸움, 그 매력을 제시하는 것에 성공했다.

<2003년 6월 30일 필자에 의한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니시다 준展’ 리플렛에서 발췌>


제작에 있어 통상적인 방법의 장치를 하지 않기 때문에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완성이 전혀 예상되지 않는다.

사람이 여러 가지 것을 경험하고 나면, “어려울 것 같다”라는 예상이 들어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것이 있다. 제작의 현장에 대해서 그런 예상을 하는 것이 새로운 표현을 만들어내는 것을 막아버리는 것이다. 

예상이 되지 않는 것. 예술이라고 하는 영역에서, 예상되지 않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작품에 대면했을 때, 놀라움과 자극을 느낄 수 있는 것인가.

이러한, 전혀 예상되지 않게 제작된 작품을 봤을 때, 그 작가의 무모라고 하는 이름의 “젊은 힘”을 느낀다.


정보사회에 있어서는 이제까지의 데이터에 기반하여 상정된 범위에서 사회의 룰이 성립되어 있다. 얼마나 지루할 것인가. 그런 사회는 미래가 없는 예상 장치밖에 되지 않는다.

아직, 경험한 적이 없는 상상이 되지 않는 작품과의 만남.
예술이라고 하는 영역에 있어서의 “젊은 힘”.
니시다를 허락한 주변의 서포트는 반드시 그런 만남을 니시다에게 부탁하고 있었을 것이다.
짧은 시간에 많은 만남을 만들어 주었다.


 

[이 게시물은 최고관리자님에 의해 2011-11-06 01:25:35 World News에서 복사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