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存在)의 기록(記錄)
-장 피엘 라로크(Jean-Pierre Larocque)의 Horse & Head Series-

홍성희

Horse 1996 Stoneware, 70x71x32.5(cm)

Untitled (head series) 1996 Stoneware, 40.5x17x21(Inch)

1. 예술가(藝術家)의 과정(過程)

흙은 모든 것을 기억한다.
흙은 매 순간 움직이는 작가의 손놀림과 작은 흔적까지 잊지도 않고 뜨거운 열기 속에서 그 소홀함을 기어이 고발해 버리고 만다. 세상 어느 일이던 간에 결과만큼이나 중요하지 않은 과정이 있을까 싶지만 특히 다른 예술과는 달리 도예만큼 자연적 질료-흙과 만나 작가(作家)가 때로는 씨름하고 때로는 어울려 가는 과정이 그리도 치열하게 기록되는, 그토록 과정이 중요시 되는 예술이 또 있을까 싶다.
문필가 신현림은 그녀의 박물관기행문 <시간 창고로 가는 길>에서 우연히 한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던 작은 항아리에서 당시 그것을 만들었을 장인(匠人)의 지문을 발견하곤 새삼 세월의 감흥을 느낄 수 밖에 없었노라고 밝혔다. 이토록 몇 세기가 지나도록 장인의 손길과 자연의 흔적을 고스란히 기억할 수 있는 유일한 매체-흙을 매일 대하는 도예가들이 경험하는-때로는 대치하고 때로는 순응해가는 창작의 과정은 서양화가나 동양화가들의 그것과는 다를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있어 작업의 과정이란 어떠한 의미일까? 단순히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한 의례상의 통과 의례일까? 아니면 자아 및 자연의 이치를 알아가는 하나의 기행일까?
1953년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태어나 인간과 말(馬) 형상을 주제로 작업하고 있는 작가, 장 피엘 라로크(Jean-Pierre Larocque, 1953) 의 작업들은 이러한 면에서 우리에게 색다른 해답을 해 줄 수 있을 것만 같다.

2. 발굴(發掘)의 시작(始作)

중세 기사(騎士)문화는 서구인들에게나 동양인들에게나 오랫동안 흥미와 향수를 자극해온 주제이다. 특히 예술 속에서 말(馬)은 오랫동안 때로는 고유의 아름다움으로, 때로는 전설 속 주인공으로, 전쟁 속의 용기와 희생, 순결함과 승리의 상징으로써 수많은 작가들에 의해 그 모습을 탈바꿈 해 왔다. 그렇다면 라로크(Jean-Pierre Larocque, 1953) 의 시리즈들도 그러한 선상에서 이해 해야 할까? 그의 시리즈들은 일종의 동물형상을 이용한 건축조각의 장식전통을 따르면서도 20세기 표현주의 작가들의 자유분방한 캔버스를 연상케 한다. 그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써 도예사의 한 장면을 끌어들인다는 것이 적당한 방법일 지 모르겠으나 마치 그의 작품은 중국 진나라 진시황의 무덤 속 일렬로 도열한 무리들 중 일부이거나 당나라 부장용 당삼채 도자기를 연상케 한다. 실제로 외형적으로 말의 실루엣을 따라 가늘게 이어져 내려오는 극히 여성적인 선들과 곧 끊어질 듯 연약한 다리, 우아한 받침대 위에 놓여진 채 노랗고 초록색인 당삼채 유약으로 대표되는 부장용 당삼채도자기 등은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모티브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1996년부터 시작한 다른 시리즈 시리즈에 주목한다면 우리는 그의 말들이 단지 중국 도자전통의 완벽성과 아름다움에 머무르지 않고 또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라로크의 시리즈를 대하는 일은 솔직히 관람자들에게 그리 유쾌하거나 아름다운 경험은 아닐 수 있다. 그 별로 유쾌하거나 아름답지 못한 그 경험이란 그의 Head들이 마치 해골이나 문둥병자를 연상시키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으나 미국 미술 비평가이자 캘리포니아 주립대(California State University, Long Beach) 교수인 카렌 크레인펠러(Karen L. Kleinfelder)는 1996년, 미시간 펀데일(Ferndale, Michigan)에서 열린 라로크의 개인전 카다로그의 서문에서 라로크의 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프로이드 이론에 입각하여 수면 아래 잠재되어 있는 관람자 자아의 가려진 어두운 이면을 다시 금 자극하기 때문에 그러한 감정이 발생한다고도 지적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그 경험은 익숙치 않음에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본다. 특히 시리즈의 작품에서 현실의 생(生)의 반대 의미로서 사자(死子)-가장 원시적인 영역-를 부르는 부장(副葬)의 이미지는 거대한 크기로 확대됨으로써 그 이미지가 강조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죽음의 그림자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Untitled (head series) 1996 Stoneware,41x20x22(inch)

나는 유년기에 이웃의 정원 안에서 벌집 안에서 밀랍으로 굳어버린 쥐 한 마리를 발견했다. 수천마리의 벌은 한꺼번에 달려들어 독침을 이용해 이 침입자를 압도해 버렸고 얼마 후 이 쥐는 밀랍으로 덮여 결국 죽은 채로 발견되었던 것이다. 밀랍 덕분에 썩지도 않고 역한 냄새도 나지 않은 일종의 미이라가 되어 버린 이 쥐를 바라보면서 나는 쥐가 밀랍 때문에 천국으로 가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좋아한다. 그것은 일종의 확실한 아름다움과 비극이 하나의 사건 속에 응축되어있는 느낌을 주며 이러한 느낌이 나의 작품 속에도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쩌면 조금은 모호한 개념이지만, 조금 쉽게 접근한다면 부드러움과 거침, 추한 것과 아름다움, 약한 것과 강한 것, 유연한 것과 어색함이 하나의 공간 안에 동시에 존재하도록 만드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좋겠다. 나는 나를 둘러싼 세계를 이러한 모순과 반대개념이 함께 하나의 공간에 공존하는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나의 지속적인 관심을 충족시킨다. 내가 속한 세계는 결국 바로 당신이 속한 세계이기도 하다.

라로크의 이 서술은 그의 작품을 잘 이해하도록 도와 준다. 이 이야기에서 모순과 반대를 기본으로 하는 이 변증법적 공간 개념은 실제로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특히 초기 시리즈는 거대한 머리 안에 음푹 꺼진 깊은 일종의 시간과 공간을 가지고 있어 그 예로 적당할 것 같다. 이 공간개념은 안과 밖이라는 도예의 공간개념을 여실히 보여줄 뿐 아니라 그가 말하는 발굴(發掘)이 가지고 있는 시간의 흔적을 그대로 보여준다. 갈라진 표면의 틈새들은 오브제가 존속한 시간을 몸으로 증언함과 동시에 얼룩덜룩하고 검은 점들로 뒤덮여 있으며 때론 부식된 피부들은 그들의 형성 과정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들은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편견을 일순간에 뒤집어 엎는 방법을 이용해 우리에게 결코 아름답지 않은 아름다움을 제시한다.

3. 과정(果程)의 폭로(暴露)

Black Horses Series, 2000, Stoneware, 29"h x 29"w

라로크는 제작과정을 숨기지 않는다. 우리는 아주 작은 노력만 한다면 그가 중력에 맞서 두상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어느 곳에 더 많은 받침대를 세워야 했는지 혹은 어느 부분에 손으로 얼마나 많이 매만져야 했는지 그 과정을 숨김없이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작품의 과정을 하나하나 눈으로 혹은 손으로 따라가면서 오브제의 역사를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원숙한 제작자로서 라로크는 전통적인 예술에서 요구하는 완벽한 미를 재현할 수 있는 능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러한 찬사대신 미완의 개연성(蓋然性)이 주는 아름다움을 선택했다. 이러한 아름다움을 극대화 시키기 위해 그는 건조와 소성을 통해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갈라짐과 우연성을 강조하고 활용했다. 그는 보이지 않는 존재에 의해 만들어지는 현상을 흙의 표면에 이루어지는 일종의 드로잉이라고 여김으로써, 이것은 일종의 드로잉으로 바뀌고 이로써 오브제는 저마다 일종의 구체적인 표정을 갖게 되는 것이다.
사실 전업작가에게 그 작업과정을 공개하는 일은 상업적인 이유에서 굉장한 모험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위험에도 무릅쓰고 그가 구체적으로 얻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그는 작업의 과정을 공개함으로써 그것이 제작기술상의 노출이라는 기술적 측면에서 받아들여질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브제 가지고 있는 역사를 인식하는 하나의 인식적 도구로서 받아들여지길 원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에서 그의 오브제들은 의미적으로나 외형적으로나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기억의 흔적을 예민하게 기록하는 존재의 역사의 기록체다. 그들은 그들이 만들어진 시간보다 더 오랫동안 존재하게 될 것이다. 흙으로 만들어진 약간은 생기(生氣)를 잃어버린 형들은 기억의 집합소-흙으로 다시 돌아감으로써 단순한 역사의 사실성의 단순함을 넘어서 시간의 심오한 깊이를 몸으로 감싸 안은 채 다시 태어난다.

4. 본질로의 회귀(回歸)

좌 : Untitled 2001 Stoneware, 24" x 11"    우: Untitled #4 2001 Stoneware 32.5x 26.5 x 15

1998년, 그의 작품들에 본격적으로 새로운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시리즈들은 보다 구체화된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과거 성(性)의 구별조차 쉽지 않았던 두상들은 성의 구별이 가능해졌을 뿐 아니라 구체적인 표정을 통해 직접적인 전달방식을 취하게 되었다. 뿐 만 아니라 2001년 제작된 대표적인 작품 Untitled (2001, Stoneware, 24" x 11")는 팔, 다리를 모두 갖추고 먼 곳을 응시한 채 자신의 의지를 곧 행동으로써 행사할 듯 하기까지 한다. 또한 그의 시리즈 역시 대단한 변화를 시작했다. 그들은 대단한 받침대를 여전히 의지하고 있지만 자연의 힘에 거부하던 지지대들은 점점 그 자취를 감추었다. 여전히 그들의 등과 사지에는 검은 반점과 시간의 상처들이 그들의 역사를 증명하고 있으나 그들은 예전보다 더욱 화려한 옷을 입고 머리를 꼿꼿이 새운 채 위엄스럽게도 서 있다. 인두(人頭) 혹은 말의 허리를 굳건히 지키던 버팀목들 역시 기존의 역할에서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때로는 장식으로, 때로는 오브제의 일부로 흡수되면서 그의 오브제들은 과거의 모습과 많이 변모해 버렸다. 이것은 그가 그 동안 천착해왔던 과정에 대한 의미부여에 변화가 일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가 처음 작업을 시작한 후 20년이 족히 지난 그 시점에서 그는 무엇을 찾고자 했던 것일까?
그 해답은 그의 작업이 결국 자연과 인간 내면의 본질을 탐구하는 데 있음에서 찾아야만 할 것 같다. 마치 사냥감을 노리듯이 주목하는 두상들과 움직일 수 없는 말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정의 할 수는 없지만, 그의 오브제들이 주는 압도감은 단지 질량감과 재료적 특성이 갖는 무게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라로크는 진실에 다가 가기 위하여 변증과모순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구체적인 제목을 붙이지 않음으로써 굳이 설명할 수 없는 부분까지 설명하려는 우(愚)를 범하지 않는다. 또한 명명(命名)의 거부는 오히려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절대 본질에 대한 정의의 불가능을 더욱 구체적으로 표명하는 도구 로 활용되고있다. 최근 그는 시리즈보다는 시리즈 쪽에 더욱 비중을 두고 작업하고 있는 듯 하다. 그의 조상(彫像)들은 때로는 커다란 용기의 형태를 변모하면서 과거 버팀목임 이자 존재의 일부였던 그들은 마티에르(matire)를 강조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모하면서 완전히 흡수되었으나 우리는 최근 작업에서 다시 그가 초기의 표현방식으로 회귀함으로써 구체적인 해답을 찾기 시작했음을 인지할 수 있다.
라로크의 일그러지고 기괴한 형상들은 우리의 감성을 불편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을 거부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우리에게 그들의 역사를 숨김없이 고백해 줄 것이 분명하다.

Untitled (Head Series), 2002 Glazed Stoneware, 38.5"h x 22.5"w x 18"d

Jean-Pierre Larocques

Born 1953, Montreal, Canada
Studio in Montreal
Represented exclusively by the Garth Clark Galle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