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민희 (조형예술학 박사)   

 

  

오랜 역사를 가진 도자공예는 다른 어떤 공예영역보다 매우 다양한 표현과 제작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양상은 문화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오늘날의 사회, 문화적 현상이나 공예의 영역에서도 문화적 측면이 강조되고 있는 추세이다. 특히 현대 도예가들은 개인적 스타일과 함께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탐구를 다각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시각에서 한국의 미학과 조형관의 표현에 풍실한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이기조(李起助:1959∼)를 꼽을 수 있다.

이기조는 조선백자의 단순한 전승이나 현대적 재현에 그치지 않고, 백자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하였다. 조선시대에 이미 백자의 최고 완성도와 미적 극치를 이루었기 때문에, 현대도예가 당시의 완성도를 뛰어 넘는 새로운 백자를 만들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조선백자를 전승하는 전통도예가를 제외하면 백자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현대도예작가는 극소수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기조는 조선백자에 대한 일관된 관심과 연구를 바탕으로 백자가 갖는 미학적 근원을 찾아 우리의 문화적 정체성을 탐구하는 현대도예가라 할 수 있다.

현재 40대 중반으로 중앙대학교 공예학과에 재직중인 이기조의 작품경향을 시대적으로 분류한다는 것은 어렵지만 현재까지의 작업경향을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1) 유기적 형태에 충실한 초기조형작품(1989∼1990)
2) 1990년대 초·중반의 현대적 공방도자(1990∼1994)
3) 조선백자의 현대적 해석에 바탕을 둔 작품(1995∼현재)으로 분류할 수 있다.

유기적 형태에 충실한 초기 조형작품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과 동대학원에서 도예를 전공한 후의 그의 첫 개인전(토 갤러리, 1989)에서 잘 나타난다. 자연과 삶의 본질에 대한 탐구에 바탕을 둔 이 시기의 작품은 유기적 형태 및 재질감의 표현으로 나타난다. 특히 유기적 형태에서 오는 자연의 사실적 이미지와 함께 추상적 이미지가 공존하는 조형도자가 주류를 이룬다.

 

 

 

 

이기조의 두 번째 시기 작품은 실용성에 바탕을 둔 공방도자가 주류를 형성한다. 이 시기에 이기조는 혜전대학 도예과 교수로 재직(1990∼1994)하면서 학생들에게 생활에 필요한 실용성 위주의 도자교욱을 한다. 이러한 도자교육을 담당하면서 작가 자신의 작업방향도 과거의 탈기물적인 조형작품에서 기능성 위주의 용기 및 기물로 전환된다. 이 시기의 공방고자는 다양한 유약실험에 바탕을 둔 다채로운 채색과 장식성을 보여준다. 특히 1994년의 이기조 그릇전(제2회 개인전, 토아트스페이스)은 오브제 위주의 조형도자가 주류를 형성하는 1990년대 한국 도예계의 상황 속에서 참신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이기조의 세 번째 시기의 작품은 조선백자의 조형적 재해석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는 1994년 말, 1995년경부터 전통도자, 특히 조선백자 연구 모임을 가지게 된다. 제작기법과 미학적 측면의 조선백자연구를 바탕으로 1995년 이후 그의 작품은 과거 작품과 확연한 차별성을 띤다.

 

 

 

 

초기의 백자연구 및 표현은 1995년의 문방구류를 중심으로 시작한다. 이 시기의 작품은 조선시대 백자의 부분적인 재현에 바탕을 둔 작업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조기 이기조의 백자작품들이 문방구 중심이라면 2000년부터는 Tableware 중심으로 전환한다. 특히 2002년의 제3회 개인전 'Winter Porcelain from Joseon'(우리그릇 麗)에서는 조선백자에 대한 미학적 관심을 현대적 감각을 지닌 일상의 용기로 잘 표현하고 있다.

 

 

 

 

이기조의 조선백자에 대한 일관된 관심은 2003년부터 제작기법의 측면에서 큰 전환점을 가져온다. 부분적으로 백자제기에서 물레성형과 깍기기법이 나타나지만 판작업이 2003년부터 그의 제작기법의 주류를 형성한다.

이기조는 2003년부터 용기(Vessel)나 화기(Flower Vase)에 바탕을 둔 기물작업을 하고 있다. 제4회 개인전(2004, 뉴욕 통인화랑)의 제목인 'Metaphor & Transformation og Joseon White Porcelain'과 같이 거의 직사각형 위주의 구조적 형태의 기물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판작업으로 이루어진 구조적 형태의 작품은 화기나 기물로서의 역할을 담당할 뿐만 아니라 실내 공간에서 하나의 오브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또한 제5회 개인전(2004, 부산 반갤러리)의 화기에서도 같은 구조적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최근 그의 일련의 작품들은 조선백자의 간결한 면치기(Faceting)나 구조적인 형태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었다. 판작업으로 나타난 직사각형의 구조적 형태의 볼륨과 표면에 나타난 질감 효과의 극대화를 통해서 이기조는 조선백자의 현대적 표현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초기의 문방구류 작품에서 이기조는 조선백자의 형태재현에 충실했다면, 판작업의 작품들에서 그는 조선백자의 이미지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그의 작업과정에서 판작업은 흙을 다루는 고도의 기법을 요구하나 각각의 판을 잇는 과정은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우연적인 작업으로 이루어진다. 이기조는 구체적인 아이디어 스케치를 바탕으로 작업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디어 구상과 제작단계가 무계획의 계획, 즉 즉흥성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이기조의 판작업은 비단 외적인 형태에서뿐만 아니라 제작과정에서도 전통 조각보와 유사하다. 마치 조선의 아낙네들이 조각보를 이을 때, 구체적인 계획을 하지 않고 눈대중으로 작업하는 것과 같이 작업과정도 작가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제작된다.

이와 같이 이기조의 작업세계는 전통미와 현대미의 조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는 조선백자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대표적인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도예가 김익영이 이 분야의 선구주자로 면깎기 기법을 중심으로 신선하고 경쾌한 조형표현을 하였다면, 이기조는 조선백자의 조형적 요소들을 재해석하여 한국의 현대적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이기조의 최근 작품들은 우리의 전통에 대한 탐구에 바탕을 두고 있다. 특히 조선백자의 미학과 제작기법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조선백자의 미학적, 조형적 요소들을 현대적으로 치환하였다. 그는 또한 조선백자의 다양한 조형적 요소들을 재해석하여 자신만의 독창적인 조형언어(visual language)로 표현하고 있다. 즉 단순히 조선백자의 과거 형태를 재현하는 전승도예가 아니라, 그것을 자기화 하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현대 백자작업에서 조선백자의 함축적인 조형미를 맛보면서 동시에 현대적 미감을 느낄 수 있는 공시성과 통시성에 바탕을 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마치 우리가 조선의 달항아리에서 맛보는 사람의 넉넉한 손맛과 담박한 맛을 그의 작품에서 느낀다. 또한 그의 작업은 태토가 가진 재료의 속성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표면적 장식보다 내면적 아름다움의 표현이 충실하다. 이기조는 태토에서 비롯된 티(철분)나 마치 금속 용접의 자국처럼 맞물린 각각의 판작업을 통해서 자연스런 느낌을 표현하고 있다.

세계적인 경매회사인 크리스티(Christie's)에 한국의 전통도자기가 경매된 경우는 있지만, 현대도자기로는 처음으로 그의 작품이 경매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그의 작품이 조선백자의 미학에 근원을 두고 있지만 세계적인 가치에 부응하는 보편성과 시대성을 표출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우현 고유섭 선생이 우리나라 전통미술의 고유한 미적 특질로 규명했던 '무기교의 기교'와 같이 이기조의 판작업에서 '무계획의 계획'의 맛을 엿볼 수 있다. 사람의 솜씨를 뽐내는 기교가 아니라 그 기교를 뛰어 넘는 기교의 시김(삭힘)에 바탕을 둔 자연주의 미학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미관이 궁극적으로 우리의 예술문화를 지탱하는 한결같은 생명력을 지닌 정체성(identity)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러한 한결같은 정신은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힘이며, 우리의 문화적 이미지를 세계화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자원이라 생각한다. 궁극적으로 이기조 작품에서 나타난 조선백자의 현대적 해석은 조선백자의 전통을 열어 가는 새로운 시대정신이라 할 수 있다.

 

 

 

 

안인기(미술평론가)  

   

조선백자의 아름다움에 대한 탐구를 이어가는 이기조의 최근 작업들은 전통적 기형과 의고적 미감을 벗어나고 있다. 오랬동안 그는 주전자나 병, 다기, 접시, 필통 등의 기물들을 백자로 제작했던 도예가였다. 때로 뛰어난 회화적 필치를 과시하기도 하고 아무런 장식이 없는 순백자의 담백하고 격조있는 아취를 보여주거나 매끈하고 탐스러운 기형의 곡선미를 느끼게 하였던 주목할만한 전통도예의 현대적 계승자였다. 그런데 이번 전시를 통해 보듯 그의 그릇은 조형의 기원에서 자신의 과거로부터 이탈하고 있다. 전시된 작품들의 기형은 기하학적인 장방형의 사각도판을 중첩하여 붙이거나 교차하는 입방체 모양이다. 입방체는 때로 그릇의 형태를 연상시키지만 대개 건축적 외관과 구조를 띠고 있다. 전적으로 백자토를 이용한 성형과 소성이라는 공통점을 제외한다면 그릇 중심의 과거 작업과 현저한 조형적 차이를 드러낸 것이다.

 

 

 

변화의 양상은 지난 2년간의 작업에서 추적할 수 있다. 우리는 백자가 한국의 지형과 풍토, 농경 문화적 식생활과 유교문화적 상징구조의 역사 속에서 파생되었고 사용되었으며 감상되었음을 알고 있다. 많은 현대의 계승자들은 평범함과 단순함의 아름다움을 특징으로 하며 결백함과 청초함, 기품과 격조를 담고 있는 두텁고 풍요로운 백자 문화의 토양을 근거로 삼아 각자의 개성있는 재해석을 시도하고 있으며 적어도 2년 전까지의 이기조 또한 그러하였다. 이제 이기조의 재해석은 클래식으로서 고전 백자의 재현과 계승의 차원이 아닌 파격과 실험을 통한 대안의 탐구로 전개되고 있다. 그것은 흥미로운 국면으로서 백자의 본성을 현대미술의 미적 원리와 결부시킴으로써 백자의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확장시키려는 야심에 찬 시도라 할 것이다.

변화의 징후가 나타난 초기 그의 작업들은 대상을 분할하고 화면공간을 재정의함으로써 새로운 회화적 리얼리티를 구축하여고 했던 큐비즘과 그 후예들의 여정을 연상시킨다. 흙덩어리를 도판(slab)상태로 만들고 사각형의 면으로 자르고 재구성하는가 하면 도판들을 3차원적으로 콜라주함으로써 추상 조각적 구조물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해 작업들에는 마치 몬드리안의 그리드화 된 회화처럼 명상과 사색을 동반한 순수 조형의 세계로 환원되는 듯한 격자형의 구조물에 도달하였다. 이기조는 빠른 시간 안에 순백의 기하학적 구조물을 이지적이고 엄격하면서도 촉각적 매력까지 지니고 있는 정신적 차원의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그 과정에서 이기조의 생각은 흙에 대한 유아기적 놀이의 기억과 인류 고대 문명의 거주공간을 만들어 주던 흙집의 기억이 가미되면서 작품의 기하학적 구조는 건축적 모티프를 연상시키는 단서를 갖게 되었다.

이번 전시는 그러한 단서에서 출발한다. 다시 말해 기하학적 엄격함을 특징으로 한 정신성과 흙에 대한 근원적 기억을 조화시키고자 하는 창작과제를 실천하는 것이다. 즉 현대적 사유와 역사적 체험의 결합을 통한 도자 조형의 심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기조의 작품들은 의미심장하게도 한편으로 건축적 모티프의 구체화로, 다른 한편으로 그릇에 대한 구조적 분석으로 나타나면서 결과적으로 양자의 구분과 분리가 불가능한 용기(container)에 도달하고 있다. 그의 용기들은 그릇이면서도 집이며 구조이면서도 표면이고 색이면서도 형태를 드러낸다. 단 한 번의 붓질을 위해 오전 내내 사색에 빠져야 했던 세잔처럼 각각의 터치가 전체 화면의 '공기, 빛, 대상, 구성, 성징, 윤곽 및 스타일을 포함"해야 하는 긴장과 섬세함을 이기조는 가장 부드럽고 예민하며 까다로운 백토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고도의 집중과 숙련을 요구하는 이기조의 작품들은 너무도 간단하고 거친 스케치로부터 시작한다. 스케치는 아이디어의 출발점이자 윤곽을 나타내지만 어떤 전개와 결말을 낳을지는 예정하지 않는다. 미래는 불학정적이지만 과정은 최선을 다한 긴장의 연속인 것처럼, 최초의 동인이라고 할 스케치는 그것도 하나의 재료처럼 흙과 함께 주무르고 매만지며 다듬어간다. 그 과정에서 이성적 판단과 감각적 자극은 상호 작용하면서 지극히 민감하고 미묘한 판단들을 수행한다. 그럼으로써 고도의 의도된 구성을 드러내면서도 임의성과 우연성이 개입된 무념무상의 자연스러움을 읿지 않는 이기조의 조형을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이기조의 특성을 이해하는데는 물질과 신체사이의 보다 사려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폴 발레리는 "화가는 신체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예술가의 마음이 아닌 몸이 움직임으로써 작품이라는 사건의 표면이 만들어진다는 평범하고 당연한 이치를 환기시키는 말이다. 이러한 견해를 발전시킨 메를로-퐁타의 주장처럼 예술적 비전과 운동이 상호작용하는 신체가 곧 작품의 바탕이요 미적 기원인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적용한다면 이기조의 정신적 물리적 비전을 투시하고 있는 순백의 표면은 그가 지닌 흙에 대한 신체의 기억과 기하추상의 예술적 비전을 육화하는 표상이며 물질과 정신을 융합하는 전쟁터이다. 신체의 표면과 흙의 표면이 만나는 그곳은 이기조의 조형적 분투가 벌어지는 장소이며 직관과 손의 묵시적 지식-tacit knowledge, 숙련된 장인만이 지닐 수 있는 습득된 신체의 지식으로 Peter Dormer가 설명한 바 있는 - 사이의 팽팽한 긴장이 지속되는 공간이다. 직관과 신체의 본능적 차원인 묵시적 지식에 의지하여 이기조는 조형의 촉각적 비전을 생산한다. 만지고 느끼며 성형하는 과정은 신체의 움직임과 물리적 신경계적 자극을 동반하며 즉흥적 변이와 우연적 조형을 허용한다. 그것은 고도화된 인공물이며 이기조의 육화된 표상이지만 또한 그것 자체로 독자적인 존재와 의미를 구성하는 자연과도 같은 대상이 되어간다.

 

 

 

이기조의 작품을 이러한 관점에서 파악하는 것은 그의 작업과정에 대한 이해만이 아니라 그 최종 결과물로서 작품의 미적 감상에서도 중요한 힌트를 제공한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백자를 이루는 두터운 문화적 배경을 소유하고 있다. 백토가 소성을 통해 구현하는 아백색이니, 순백색이니, 세월을 머금은 유백색이니 하는 시각적 감각을 세련화 하는 골동적, 의고적 미의식은 백자의 아름다움을 선험적 차원으로 회귀시킴으로써 고답적 백자관을 절대화한다.

다른 한편으로 최순우의 유명한 말처럼 순백자의 달항아리를 두고 "부잣집 맏며느리 같은 후덕함"을 말함으로써 백자의 미학을 소박한 조선적 삶의 역사로 변형시키는 담론들이 존재한다. 이에 비해 이기조가 제기하는 것은 경험적이며 체험적이고 실제적이며 구체적인 차원의 백자이다. 그것은 백색의 물신적 숭배도 아니며 백의민족의 생활을 추억하지도 않는다. 그것 자체로 독자적이며 실존적인 의미를 지닌 백색 용기를 보여준다. 우리는 이기조의 백색 질료를 통해 그 순백의 조형을 두고 분투했던 세잔적 고뇌와 자신의 시공간을 온전히 구현하고자 하는 실존적 떨림과 긴장을 함께 느낄 수 있게 된다. 이로써 백자이나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조형이 펼쳐진다. 백자이지만 그것의 선험적 관념과 역사적 일루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백자의 조형을 만나게 되는 것이며 그것을 더 이상 백자로 부르지 않아도 된다는 차원에서 이기조의 실험은 더욱 매혹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