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본수(삼성미술관 전임연구원)   

인간은 흙에서 태어나 흙과 함께 살다가 다시 흙으로 되돌아간다.

기원전 7000년경부터 인류는 농경과 목축을 시작하였다. 신석기 혁명이라 불리는 인류 출현 이후 최대의 생활상의 변화는 바로 땅을 경작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인류의 삶과 문화는 땅, 곧 흙과 더불어 꾸려져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흙은 우리의 생활 속에 깊숙이 침투해 있는 삶의 터전이자 친근한 표현의 매체이다. 세계 여러 민족의 신화나 종교를 보면 인간이 흙으로부터 기원하였다는 시원적 설화가 전해지고 있으며 흙은 곧 땅을 의미함으로써 우리의 삶과 문화에 풍부한 상징과 상상력을 제공하여 다양한 표현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

흙이 지닌 물질, 원소, 원료적인 특성은 땅이 갖고 있는 고향, 어머니, 대지모신(大地母神) 등의 상징적 개념으로 확장되어 인간의 삶과 죽음, 생명, 생태, 향토성과 순수 등을 주제로 하는 문학과 예술 각 장르에서 주요한 소재가 되어 왔다. 특히 인간의 생활과 조형활동에서 흙이 차지하는 비중은 막대하여 신석기시대부터 곡식의 저장과 조리를 위한 토기의 재료나 건축물을 짓는 자재로 사용되어 오는 동안, 흙은 인간의 모든 조형활동의 밑바탕이자 창조의 원동력이면서 동시에 편안함과 즐거움을 제공해 왔다. 흙과의 접촉은 인간이 갖고 있는 가장 원시적인 창조 행위이며 원초적 즐거움이라는 작가 원경환의 말은 흙과 관련된 조형예술 전반에 걸쳐 공통된 명제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추구하는 조형작업의 출발점이자 귀착점은 바로 흙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점토(粘土 ; Clay)이다. 점토는 암석 풍화분해물의 총칭으로 0.01mm 이하의 미세한 입자인데 물을 섞어 반죽하면 점성을 띠게 되고 일정하게 만들어진 형태를 불에 구워 내면 단단하게 굳어지므로 벽돌 기와 도자기 둥의 원료가 되어 왔다. 흙을 이용한 생활용기와 예술 작품들은 대부분 이러한 흙의 점성과 가소성을 이용하여 만들어지고 그 수명은 길게는 1억 년까지 이어진다.

원경환의 작업에서 흙은 창작의 근원이자 결과물로 나타나고 있다. 흙의 물성에 익숙해질수록 그는 그것을 가공하고 빚어내어 무엇을 만들기보다는 흙 본래의 느낌과 표정을 찾아 제시하고자 한다. 흙에 대한 탐구의 결과 그는 마치 강줄기를 거슬러 올라 고향을 찾아가는 연어의 회귀(回歸)처럼 본능적으로 흙 본래의 질감과 물성을 추구한다. 또한 가소성에 의해 생기는 흙의 조형과 빛깔을 찾아 원시에 가까우면서도 무척이나 현대적인 미감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1954년 서울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 대학원과 일본 쿄오토 시립예술대학 대학원에서 도예를 전공한 원경환은 도예로 출발하였지만 일반적인 개념의 용기 제작보다는 '도조(陶彫)', '조형 도자' 혹은 '오브제 도예'로 불리는 탈공예적인 경향의 작품들을 만든다. 일반적으로 도예를 흙과 불의 예술이라고 하는데, 원경환은 이러한 전통적인 도예로부터 '흑도소성(黑陶燒成)' 기법을 받아들여 가마의 불과 매연에 그을려진 내밀한 흙의 표정을 제시하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도예의 재료인 점토를 유리창이나 기하학적인 형태의 구조물에 발라 점토가 마르면서 자연스럽게 갈라지는 흙의 균열감을 인상적인 조형언어로 활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는 탈공예적인 조형작업과, 주어진 공간을 해석하여 흙을 이용한 설치작업을 동시에 펼쳐 순수한 작품세계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작품 경향은 이미 1980년대 초반 일본 유학시기부터 형성되었다. 1983년 쿄오토의 베니(紅)화랑에서 열린 개인전에 출품한 작품은 한 변의 길이가 10cm정도인 정육면 입방체의 단위(unit) 작품들을 무수히 늘어놓는 설치전이었다. 그 이후 1985년과 1986년 마로니에 화랑에서 열린 개인전에는 흙 표면의 색상 변화나 질감 차이를 보이는 보다 큰 단위를 규칙적으로 나열하여 설치하는 작업을 출품하였다. 이때부터 그의 주요한 조형언어라고 할 수 있는 미니멀한 형태와 동어반복(同語反復)적인 설치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단순한 형태 그것도 작은 개체를 모아 반복 설치함으로써 작품이 발산하는 힘과 에너지를 극대화하고 있다. 이것은 가마 소성으로 인해 규모가 큰 작품을 만들지 못하는 도예의 현실적인 한계를 동어반복이라는 형식으로 극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 1987년의 개인전에서 그는 혹도 기법으로 만든 길쭉한 도판을 500장이나 늘어놓는 설치전을 열었다. 이 때는 우리 미술계에 도조의 개념과 현상이 활발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무렵이다. 도예와 조각의 결합을 의미하는 합성어인 도조는 주로 도예 영역에서 파생되어 전통 도자의 극복과 더불어 새로운 표현 가능성을 확장하려는 경향을 지칭한다. 이러한 도조와 같은 양상을 도예에서는 보통 오브제 도예 또는 '조형 도자'라 부른다. 미술사적 문맥에서 오브제(Object)란 본래 사물이 그 상태 그대로 작가의 태도나 의도, 개념 등에 의해 예술적 컨텍스트로 인입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도예에서는 주로 종래의 기물이 그 용도나 개념을 탈피하여 표현의 맥락에서 다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미술에서 오브제는 형태의 변화가 그리 없는 반면 도예의 경우는 주로 형태 변화에 의해서 새로운 컨텍스트로 진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물레 성형으로 제작하여 그릇이 될 것이 형태 변화에 의해 도구적 맥락에서 이탈하여 오브제 조형이 된다.

이러한 소위 입체적인 조형으로서의 도예는 1950년대를 전후하여 일본에서는 야기 가즈오(八木一末)에 의해 미국에서는 피터 볼코스(Peter Voulkos)에 의해 거의 동시에 시작되어 급속하게 퍼졌으며 1950년대 후반부터 전개된 한국 현대 도예계에도 해외유학을 경험한 도예가들을 통해 그 영향이 미치기 시작하였다. 이 비실용적인 도예의 성립은 조형성의 추구라는 점에서는 일본과 미국 모두 공통되나 그 직접적인 계기는 상반된다. 이를테면 일본은 그때까지 전통적인 양식에 안주하고 있는 일본 도예계의 보수성에 대한 반발과 부정, 그리고 그것에 구애받지 않고 내부의 요구를 솔직하게 표현하려고 하는 의욕 때문이었으며 이것에 반해 도예의 전통이 없던 미국에서는 당시 활발했던 추상표현주의 회화에 자극되어 화가가 손과 캔버스와의 직접적인 관계를 작품화한 것처럼 도예가들도 몸 전체를 흙에 부딪쳐 다이나믹한 형체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태도는 추상표현주의 회화가 칠하고, 선을 긋고 하는 전통적인 회화수법 뿐만 아니라 모래나 천, 그리고 기타 물질을 붙이는 등 틀에 박힌 제약을 넘어선 작업을 하게 된 것으로부터 유발되었으며, 또한 흙이라는 재료의 특성 자체가 새로운 조형을 모색하는 시점에서 추상표현주의 정신의 구현에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한국의 도예가 전통을 계승하려는 노력과 탈공예적·비공예적 경향으로 이원화되어 전개되는 과정에서 미국과 일본 둥 국제적인 추세를 따르는 작가들이 현대 도예계의 주류를 형성하였으며, 이들은 모더니즘 계열의 회화나 조각과 마찬가지로 서구의 영향을 받아 출발하게 되었다. 이들 작업의 대부분은 조형의 근거를 레디 메이드나 오브제, 그리고 소위 '물성'이라 불리는 질료 자체에 대한 탐구에 두고 있어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원경환의 경우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그는 전통적인 도자 예술에 있어 필수적인 불에 의한 소성(燒成)이나 시유(施釉), 가마의 용적량으로 인해 생기는 작품 크기의 제한 동 도자예술이 갖는 한계로부터 탈피하거나 변용하여 탈장르적이고 실험적인 창조의 영역을 구축해가고 있다. 다음의 인용문은 전위적이면서도 실험적인 스타일리스트로서의 그의 작가 의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나의 작품은 종래의 고전적 미술관이나 정통의 미학 둥의 영향을 거의 받고 있지 않다. 반사회적인 메시지나 비평의식, 즉 '의미'보다도 스스로 발견한 오브제와 흙과의 결합으로 보여줄 수 있는 '스타일'을 중시한다. 기하학적인 형태, 표면에의 관심, 형식상의 자유를 위한 오브제의 발견, 그것은 또 하나의 도전으로서 내 작업의 기초가 되고 있다. 흙이 나의 출발점이라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그러나 나를 흥분시키는 것은 다른 소재와의 만남이다. 그 소재는 형태를 부여하는 동안 그의 언어로 강하게 다가온다.

발견된 오브제와 흙과의 만남이 진행되어 갈 때 긴장이 있고 대화를 형성하는 움직임이 있다. 완성된 물건(작품)의 기능이나 내구성은 창조성 또는 발상의 다음 문제이며 시간의 흐름에 의해 관람자는 공간 속에서 색다른 시각적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고정되지 않고 변화하려 하는 나의 작품이며, 만족을 위한 내 자신과 선택된 관람자이며, 그 관람자는 작품의 완성을 강하게 보강해준다."

원경환의 작품 경향은 크게 두 가지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의 예술의 출발점인 도예의 기본적 제작과정인 성형-건조-소성이라는 일련의 공정을 거친 흑도소성 기법의 오브제 작품들이 그 하나라면 원료로서 흙의 가공되지 않은 본질적 표정과 물성을 탐구하는 현장 설치작업이 다른 하나이다. 전자가 그를 도조 작가의 범주에 들게 한다면 후자의 작품들은 그를 흙을 이용한 설치작가의 개념에 속하게 한다.

흑도소성이란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토기류와 전래의 떡시루, 또는 기와 같은 물건을 만들 때 사용하던 원시적인 소성기술로 연료인 장작에서 생기는 매연을 태토(胎土)에 흡착시켜 검은 빛을 띠게 하는 방법이다. 이 기술은 유약으로 태토를 덮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심한 환원소성시 생기는 매연으로 태토를 검은 색채로 감추면서도 흙이라는 원료를 부정하지 않는 교묘한 수단의 소성방법이다. 가마의 구조와 점토의 선택에 따라 부분적으로 회색, 적색, 황적색 등 다양한 발색을 얻을 수 있는 흑도소성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으나 소성방법의 발달로 질 높은 도자기류가 등장하면서 그 맥이 끊기게 된다. 유약을 사용하지 않고 흙의 표정을 불의 흔적과 함께 그대로 전달하는 매력 때문에 많은 도예가들이 관심 있어 하면서도 소성상의 번거로움 때문에 기피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흑도는 600℃ 정도의 저화도로 작품을 완성할 수 있으나 작품의 강도를 위해서 먼저 850℃ 이상의 온도에서 초벌 구이를 거쳐 일정한 강도를 유지할 수 있게 한 후 재벌 구이에서 매연을 입히는 방법을 사용한다. 작가는 검은 색깔의 표면을 생성해 내기 위하여 소성시 생솔가지와 같은 덜 마른 나무 외에도 폐타이어를 넣어 태우기도 한다. 점토 덩어리에 마치 본래부터 타고난 것처럼 그윽한 검은 빛깔을 먹인 소품들이나, 그 위에 철이나 나무 등을 결합하여 만든 작품들을 보면 원경환이 도자예술의 전통으로부터 변용을 시도하여 또 다른 조형예술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약은 소재의 표면을 코팅하는 방법이죠. 그러니까 흙의 성질을 완전히 감싸 버리고 맙니다. 옷을 입히는 것과 같다고 할까요. 제가 강조하여 표현하고 싶은 것은 흙의 물성이기 때문에 유약을 사용하지 않고 흑도소성이라는 방법을 택하게 된 겁니다. 그것은 흙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흙의 색깔을 바꾼다는 묘미가 있는 그런 소성방법입니다"

원경환의 흑도 오브제는 조각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기하학적 기본형태인 원형, 입방체 또는 원통형을 조형적으로 변형시킨 것이다. 또 작가는 점토의 특징을 강조하기 위해서 다른 재료를 결합 또는 병치시켜 흙의 느낌이 대비되는 효과를 의도하기도 한다. 점토에 철·나무 둥을 결합한 작품에 〈토생금(土生金)〉 〈목극토(木克土)〉 둥으로 제목을 붙인 것을 보면 그의 사고가 동양의 철학적 원리인 오행사상(五行思想)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의 생명을 유지하는데 가장 긴요한 물(水)과 불(火)에서 시작해서 생활 자재인 나무(木)나 쇠붙이(金)를 거쳐 모든 것의 기반이 되는 흙(土)에 이르고 있는 오행상생(五行相生)의 조화와 이치를 그의 작업에 견주어 보면 점토(士)에 물(水)을 이겨 빚어 낸 형상을 불(火)로 구운 뒤에 나무(木)나 쇠붙이(金)를 결합하고 있기에 오행의 다섯 가지 물질적 재료를 현대미술의 조형요소로 담아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토생금〉이라든가 〈목극토〉라는 제목이 사실은 없었어요. 처음 제작했던 작품 중에 다른 재료를 쓴 것으로는 철망이나 철판을 썼던 것이 시작이 됐는데 그 때는 제목 없이 〈무제〉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그러던 중에 음양오행에 대한 책을 보게 될 기회가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의미를 찾게 된 것이죠. 제가 주로 쓰는 〈토생금〉이라고 하는 것은 상생(相生)의 의미가 있고, 〈목극토〉는 상극(相克)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상적인 면보다는 재료적인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서 붙인 제목이 되겠습니다."

원경환이 가마소성을 탈피하고 생흙을 붙여 설치작품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1988년 갤러리 토에서 열린 흙을 주제로 한 기획전에서였다. 철망 위에 흙을 붙인 설치작업을 통해 그는 도예의 틀에서 벗어나 열린 의미에서의 순수 조형작가로 나서게 된 것이다. 다음 해인 1989년에는 토오쿄오의 사가쵸(佐賀町)전시관에서 파격적인 작품을 펼치게 된다. 이 전시관은 1920년대에 지어져 창고로 사용되어오던 건물을 개조한 것으로, 약 100평 규모의 장방형 구조와 아치형의 창문이 독특한 형태를 이루는 공간이다. 전시를 제안 받은 그는 고심 끝에 창 전체에 점토를 바르는 작업을 실행하였고, 전시장 중앙에는 축소된 테라코타의 창을 세워 미니멀하게 긴장된 예상 밖의 공간을 연출하여 큰 화제를 모았다.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작품이란 플러스(+)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나 이번 전시는 마이너스(-)적인 것이다. 빛을 받아들이는 창을 흙으로 차단시키면서 흙의 균열 사이로 약간의 빛을 투과시키려 한다."

사가쵸에서의 전시에 이어 1992년에는 토오쿄오의 소게츠(草月)미술관에서 흙 설치전을 갖는다. 층고가 높은 로비의 넓은 공간에서 펼쳐진 작업은 종래의 단위 작업의 연장이면서 그것을 한 단계 뛰어 넘는 흙의 물성과 공간을 보여준 기념비적 성격의 조형작품이다. 불규칙한 계단식 로비에 놓인 이사무 노구치의 작품과 대비를 이루면서 함께 어우러진 설치작품 〈흙의 인상〉은 시각적으로 그 크기와 조형적 구성에서 전체를 압도하는 규모였다. 1995년 나고야 아이치(愛知) 현립미술관의 〈환류(環流)-한일현대미술전〉에 출품한 작품은 흙기둥을 정열하여 배치한 대규모의 설치작업이었다. 한편 1996년과 1997년에는 투명한 아크릴 박스의 내부에 흙을 바르는 작업을 확대하여 설치하였다.

철분이 함유된 점토 덩어리를 앓게 잘라내어 특정 공간의 유리창이나 기하학적인 형태로 세운 구조물 위에 바르는 흙 작업은 노동이라기보다는 즐겁고도 무심한 놀이에 가깝다. 현장 흙 작업의 주된 이미지는 흙이 마르면서 갈라지는 균열이다. 시간의 경과에 따라 변화하며 갈라지는 흙의 표면은 마치 거북의 등껍질이나 가뭄에 드러난 논바닥 같기도 하다. 또 유리창에 발라진 흙 표면의 틈새로 스며드는 빛의 밝기는 시시각각 변하면서 전체적으로 어두운 흙의 공간을 아늑하면서도 미묘한 관조와 명상의 공간으로 이끌고 있다.

유리와 철골로 이루어진 현대적인 건축물인 로댕갤러리에서의 전시를 위해 제작된 〈흙의 인상〉과 〈대지의 내부〉는 불규칙한 흙표면의 질감과 기하학적이고 모뉴멘탈한 입체적 구조물들이 어우러져 유희와 관조의 공간을 연출해내고 있다. 고대 신전의 열주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사각의 흙기둥 설치작업은 곧게 뻗은 수직의 상승감과 단순한 형태의 반복이 주는 강한 힘으로 인해 종교적이면서도 명상적인 공간을 조성하고 있다. 5미터 높이의 기둥 18개가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된 열 사이를 지나는 관람객은 기둥에 발라진 흙의 원초적인 빛깔과 균열을 통해 편안함과 더불어 유희 충동을 느끼게 된다. 현대 문명에 의해 가리워지고 감추어진 흙의 모습을 바로 그 현대 문명의 상징인 빌딩과 같이 솟은 흙 기둥의 숲에서 만나게 되는, 원시와 현대가 대비되면서도 공존하고 있는 작품이다.

로댕갤러리 전시장 한 면을 이루는 10미터 높이의 전면 유리창을 점토로 바르는 작업인 〈대지(大地의) 내부〉는 〈흙의 인상〉이 흙의 표면적 균열감을 제시하고 있는데 반해 흙의 내부에서 바라보는 균열감을 느끼게 한다. 흙의 갈라진 틈새로 파고 드는 빛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면서 흙의 인상을 바꾸어 간다. 밝은 대낮이면 마치 무성한 나뭇잎들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작은 빛들의 하모니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하며, 흙 기둥과 함께 조성된 풍경은 스테인드 글라스로 장식된 중세 성당의 명상적이면서도 관조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작가는 흙이 가진 표현력을 극대화시켜 마침내 흙과 불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도예의 영역을 흙과 빛, 그리고 공간까지 확대하여 독자적인 분위기와 스타일로 조형 영역을 확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흙과 결합했던 수분이 증발하면서 생기는 우연한 균열로 조형을 얻어낸 작가는 거기에 빛을 끌어 들여 서정적이고 불규칙적인 추상회화의 화면 같은 효과를 연출함으로써 관람객으로 하여금 인상적인 흙의 표정을 각인하게 하고 있다.

원경환이 도예를 처음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 배운 도자기의 개념은 균열이 생기면 안되고, 또 유약이 덜 녹거나 너무 녹아도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흙을 접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작가는 균열감이라고 하는 것이 점토가 갖는 가장 기본적인 속성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고, 유리창이나 사각 기둥에 흙을 바르는 작업을 하게 되었다. 흙은 과학적으로는 무기재료로 구분된다. 무기재료라고 하는 것은 생명력이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흙이 작가의 손을 거치면서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유기재료로 변하게 된다. 이것이 작가가 갖고 있는 흙에 대한 관념이자 인상이다. 1990년대 이후의 근작들과 현장 설치작업이 함께 하는 이번 개인전은 1980년대 초반 일본 유학시절부터 시작된 작가의 탈장르적이고 실험적인 예술세계를 조명하고 미래를 내다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21세기의 벽두에 로댕갤러리에서 펼쳐지는 그의 흙 작업은 인간과 가장 가까운 원초적 자연인 흙에 대한 사유와 흙이 지닌 미감을 새롭게 인식하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