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중국을 냉소하는...
우관호/홍익대학교 도예유리과 부교수
최근 중국의 도예에 관한 개인적인 관심으로 세 사람의 작가들을 소개한 바 있다. 곤충대왕으로 불리는 정교한 묘사력의 판 펭린, 이싱 즈샤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디자인하는 장 쇼우츠, 천목유의 심오한 색채와 깊이를 다루는 루 샤오추앙 등 자료가 입수되는 대로 소개하면서 공통적으로 느낀 점은 각 개인의 뛰어난 기량도 그러려니와 궁극적으로는 중국의 전통적 기법과 특질을 배경에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번에 소개하는 황 셩(黃 勝)은 1993년 징더전(景德鎭)도자대학교 조각과 및 2003년 중앙미술학원 대학원을 졸업하였으며 현재 모교인 징더전도자대학교에 부교수로 재직중이다. 교직외에 잡지 『중국도예』의 편집에 참여하고 있고 중국조소학회, 중국공예미술학회 회원 등으로 활동중이며 1999년부터 2003년까지 중국내와 일본 등지의 공모전에서 수상하는 등 작가로서 교육자로서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는 이력과는 달리 상당히 의외적인 것들이 묻어 있었다. 사실 황 셩의 작품을 겉으로만 본다면 콜롬비아 화가 페르난도 보테르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체의 데포르마숑과 미국 도예가 마이클 루세로의 작품에서 감지되는 초현실성 등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따라서 황셩의 작품은 조소적 인체해석과 중국적 채색기법 등이 어우러진 일종의 우화적 경향을 띤다고 단정할 수도 있으나 그 내면에는 또 다른 해석의 여지가 남아 있다.
그의 작품의 큰 줄기는 묵시적이면서 탐욕적인 부피감의 두상에 채색기법으로 꽃과 여자를 그린 것과 풍만하다 못해 체지방만으로 이루어진 듯한 여자와 남자가 혼자 혹은 둘이서 연출하는 상황으로 나누어진다.
기술적인 면에서 두 줄기의 공통된 점은 우선 그의 성형력이나 채색력이 그다지 정교하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전자의 경우 모두 세 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리나라 60년대의 화장품 모델같은 여자들과 나일론 이불보에나 나옴직한 꽃들이 조잡한 듯 현란하게 그려져 있다. 작품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필력이나 묘사력이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전문가의 솜씨로 보기에는 어려울 정도로 서툰 구석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세한도의 고졸미와 같은 느낌도 아니다.
작가에게 직접 물어보기 전에는 확인할 수 없는 아주 기묘한 기분을 들게 하는 터치와 구성이며 키치적이라고 하기에도 좀 내키지 않은 구석이 있다. 그러나 약간 떨어져서 3점을 동시에 바라보면 색채의 강한 대비감과 함께 그림 밑에 감추어진 두상의 표정이 교묘하게 오버랩되어 나타난다. 마치 그 두상이 상상하고 있는 사실들이 겉으로 배어 나오듯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느낌들은 유약에 의해 더욱 두드러진다. 두상을 덮고 있는 광택유는 인간의 탐욕을 상징하는 개기름처럼 번들거리며 표면에 그려진 여자들의 입술을 더욱 붉게 만들고 있다.
두 번째 줄기의 작품 역시 기술적인 면에서는 전자와 거의 같으나 내용의 전개는 조금 다른 방식을 취하고 있다. 한 사람의 여자 혹은 남녀가 혼자 있거나 같이 있으면서 기묘한 눈빛과 동작으로 자신을 혹은 서로를 탐닉하고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분명히 동양인의 얼굴이지만 노랗거나 갈색의 머리이며 그 몸매에 어울리지 않는 민소매 원피스를 자신만만하게 입고 있다. 한편 흥미로운 것은 그 여자의 얼굴이 당(唐)의 도용의 얼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찢어진 눈, 작고 오목한 입, 통통한 볼 등은 당의 미인들과 거의 흡사하지만 진한 아이라인과 립스틱 그리고 금색으로 반짝이는 하이힐 등이 현대의 중국여인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이 두 여자는 화장과 흡연을 통해 오늘날의 여성들이 행하는 보편적 행위들을 암시하고 있으나, 얼마 전만 하더라도 사회주의 체제의 중국에서는 거의 보기 힘든 모습들이었다. 여기에서 황 셩의 냉소가 한 번 작용한다.
덩샤오핑(鄧小平)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 이후 급팽창한 중국의 경제는 국민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한 편 자본에 의한 부작용도 감수할 수 밖에 없게 하였다. 자본을 획득한 인간들은 좋은 음식과 노동의 결핍으로 체지방을 점점 키워나갔고 양질의 공업제품들과 자본주의 문화의 유입은 남녀 할 것 없이 사치와 향락에 관심을 돌리게 하였다.
화장을 마치고 담배를 한 대 핀 후 여자들은 또 그들과 같은 부류의 남자들과 시간을 보낸다.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고 음악이 흐르는 곳에서 춤을 춘다. 황 셩의 작품에 나타나는 남녀들은 적어도 청춘은 아니다. 남자의 벗겨진 머리와 두꺼운 목덜미가 그렇고 여자의 홍조띤 얼굴과 문신한 듯한 눈썹이 그렇다. 따라서 그들은 부부라기 보다는 어른들이 가는 곳에서 만난 남녀들이다. 얼큰하게 술이 오르고 분위기가 고조된 남녀들은 둘만의 공간을 찾아 떠난다. 그 곳은 집이거나 사무실이거나 아니면 호텔이거나 상관없다. 이른바 원 나잇 스탠드(one night stand)인 셈이다.
이쯤되면 황 셩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이 된다. 물론 중국에 황 셩같은 작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샹하이 비엔날레를 중심으로 약진하는 중국의 미술은 많은 분야에서 걸출한 작가들을 소개하였다. 그 작가들 가운데 황 셩처럼 중국의 사회적 변화와 그로 인한 부조리 등을 주제로 하는 작가들도 적지는 않다. 이렇게 본다면 그의 작품은 내용적인 면에서도 특별한 면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그의 작품에서 이례적이라고 느껴지는 것은 중국이라는 문화적 토양을 딛고 사는 작가로서의 태도이다.
예술작품의 기의표현에는 여러 가지 테크닉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은유, 상징 등의 용어로 규정 해석하고 또 그 안에서 무언가 의미심장한 것을 찾으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특히 도예의 경우 물레에서 만들어진 형태 그 자체가 추상적이고 질료의 탐구나 물성에 천착하는 경향도 적지 않기 때문에 설명적이거나 직접적인 작품에 몰두하는 작가들은 그다지 많지 않으며 그러한 사례는 동양의 도예에서 더욱 빈번하다.
특히 사회주의를 체제의 기반으로 하는 나라에서, 그것도 자본의 팽창으로 인한 부작용이 사회이슈가 되어가고 있는 시점에서 남자와 여자 즉 인간이라는 다중적 기의를 가진 기호를 통해 오늘의 중국을 냉소하는 황 셩의 작품은 예술의 역할과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기회를 갖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