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에게 자연은 철저히 분석하여 논증된 과학의 자료이기보다는 무엇이든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순응의 지혜를 터득하게 한 위력의 존재였다. 예술가는 자연을 직접 체험하면서 수양을 쌓음으로써 새로운 생명을 얻어야 하고, 자신의 주관과 자연의 객관을 서로 융합하여야만 자연의 영묘함을 통찰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전통적인 예술관이다. 이것은 곧 자연을 보는 우리의 세계관으로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고, 한 민족의 생활 풍습과 특성을 만들어 내는 기초적인 작용을 한다.

 

 

 

 

 서구 문화와 우리 문화가 다른 이유는 자연을 보는 관점의 사이에서 시작된다. 서로 살고 있는 지역의 분위기가 같지 않고, 서로의 지형과 기후가 같지 않다는 것은 서로의 문화와 생각이 같지 않음이다. 너무나 당연한 이 같은 이치를 새삼 돌이켜 봄은 허민자의 ‘제주의 노래’ 때문이다. 내가 서 있는 흙 색깔과 그가 서있는 흙 색깔이 다름을 느끼고 , 새삼 돌이켜 보는 것은 그가 보여주는 제주에 대한 독특한 감정 때문이다. 이것은 그 동안 잊고 있었던 자연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발견하게 한다. 나의 자연과 너의 자연이 틀리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조화를 이루는 균형된 자연을 구사할 수 있다 이것은 서로 다른 위치에 있기 때문에 서로 나눌 수 있는 것이 있다는 평범한 이치를 돌이켜 보게 함이다.

 

 

 

 

 그러나 허민자는 자연과 몸과 마음이 합치된 내적 수양을 강조하는 거창한 예술관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언제든지 무엇도 거절하지 않은 열려진 자세와 공간을 말하고 싶어한다. 흔히 무작위, 무형식, 무관념이라고 하면 혼돈과 무질서를 떠올린다. 그러한 허민자는 그런 것들에 별 관심이 없다.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규율이나 형식에는 별 흥미가 없었기에 새삼 그것들을 벗어 던질 이유도 없다. 그의 눈과 마음을 끌 수 잇는 것은 자유로운 자연, 단 한번도 규율을 만들어 본적이 없으면서도 항상 자신의 몸집을 잘 가다듬고 있는 거대한 자연, 위대한 자연, 진실된 자연의 발견에 있다.

 

 

 

 

 그의 자연물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대상이다. 이상을 키우며, 정신 수양을 쌓으라는 고고한 자연이 아니다. 너무 친숙하여 무심코 지나쳐 버리기 쉬울 정도의 생활 속의 자연이다. 가장 가까이 있는 자연물을 자신의 주제로 삼고 있기에 늘 가까이 하며 관찰한다. 자연은 그에게 멀리 두고 바라보는 관상용이 아니다. 직접 걸어보고 만져 볼 수 있는 우리들 모두의 손에 잡히는 자연이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모호한 고민 따위를 안겨 주지 않는다. 제목이 확실한 것 만큼 그의 생각과 자세는 확신에 차있다. 자연 속에, 흙 속에, 무기교 속에 가장 큰 세계가, 완전한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소중함을 안다. 한라산, 억새풀, 화산석은 그가 체험한 자연이며, 그가 흔히 대하는 주변 풍경이다. 변형되지 않은 있는 것만큼의 뜨끈뜨끈한 제주의 모습을 담고 싶은 욕심은 자연이 발산하는 놀라운 빛깔과 모양의 신비함에서 비롯된다. 아마 특별히 제주의 이미지에 관심이 있는 것은 그의 주변이 제주이기 때문이지, 어떤 지역에 한정을 둔 미리 짜여진 계획은 아닐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보자, 제주, 한라산, 화산암 등의 매개체로 한정된 시각은 허민자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된다. 그는 자연을 대하는 마음을 제주를 통하여 표현한 것이다. 그의 주변이 제주이기에 쉽게 손 닿을 수 있는 매개체가 제주였을 뿐이지, 그가 또 다른 어떤 지역에 있었다면 아마 다른 소재를 통하여 똑 같은 자연을 표현하였을 것이다.

 

 

 

 

 그의 자연을 관찰하는 자연이다. 슬쩍 보고 스치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탐구하는 자세와 섬세한 관찰력을 요구하는 자연이다. 여기에서 그가 나름의 자연을 체험하고 확인하고 있음을 살펴보아야 한다. 화산석의 조형감각을 발견하고, 체계적으로 정돈하며, 이에 걸맞는 작업을 선보인다. 현무암의 재질감, 주상절리의 조형감들을 응용한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소지와 유약 그리고 소성에서도 제주의 것을 얼마나 고스란히 살리려고 노력했는지 눈여겨 보아야 한다. 소지로 제주 점토를 사용하고, 유약으로 제주 대흥리에서 채취한 화산재와 협재의 패사를 배합하여 만든 화산재 천목유(이것은 허민자가 만들어낸 유약이다)를 시유한 것은 그러한 노력의 흔적이다.

 오래 전 ‘도등전’을 통하여 보여 주었던 그의 주제는 한국의 떡살 문양, 구름, 파도 문양 등으로 우리의 전통적인 이미지였고, 그 후에 한라의 정취와 억새 물결, 삼나무 등으로 점점 더 자연물과 친숙해진다. 처음 시작은 전통이라는 무형에서 시작하지만, 후에는 자신과 가장 가까이 있는 유형의 자연물로 구체화 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이미 말했듯이 그의 자연이 구체적인 대상임을 나타낸다. 이제 어떤 대상도 그에게는 피상적으로 비추어보고 지나칠 수 없는 소중한 자료가 되었다. 작은 돌 하나에 까지 온갖 정성을 쏟아 넣어 정리하고, 다시 자신의 것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인내와 성실은 본받을 일이다.

 

 

 

 투각 기법으로 문양을 조각한 도등은 불빛과 더불어 맛볼 수 있는 독특한 분위기를 지닌다. 한라산을 닮은 그릇 만드는 일을 즐기고, 산 기슭에 꽃처럼 피어 있는 억새풀의 모습을 유약으로 그리는 일도 즐거운 일이다. 그리고 현무암의 기공을 하나하나 만들면서도 마냥 기쁠 수 있다. 이렇게 마무리된 흙 작업이 불 속에서 잘 익어서 나올 것을 기다리는 일이 아마 그에게 가장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도예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쟝르에서도 맛 볼 수 없는 내력일 것이고, 그만 둘 수 없는 마력일 것이다.

 

 

 

 자연물 그대로를 표현하고자 노력한 흔적은 아마 그가 간직하고 싶은, 보존하여 후손에게 물려주고 싶은, 또 주변의 풍경을 그대로 옮겨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자연에 대한 애착으로 생각된다. 더구나 하룻밤만 지새도 무엇이든 하나라도 바뀌고마는 요즘 세상을 대하면서, 아쉬움 없이 시간의 급류에 휘말려 사라지는 세상 모든 것에 대하여 남다른 애틋한 감정을 보유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제주의 이미지라는 제목과 제주토의 붉은 빛깔, 그리고 화산암이 구사하는 많은 이야기는 우리에게 새로움을 위한 새로움의 신감각이 아닌 자연스러움 속의 감동을 담고 있다.          

                                                              김숙경/미술평론가

 

 

 

  허민자 교수는 약 35년 전 제주에 정착한 이래 꾸준히 제주의 자연 특히 현무암의 재질감이나 주상절리의 조형감 등을 이용하여 작품을 발표해 왔다. 그의 작품에서 제주의 이미지는 지역 색을 살린 소지와 유약, 그리고 끊임없는 조형 탐구의 자세를 통해 발현되었으며, 이는 많은 이들의 찬사를 이끌어 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번 인사동에서 열린 허민자 교수의 12번째 개인전은 현무암의 형태나 질감, 기공 등을 기조로 하여 조형적인 미를 추구하던 예전의 작품들과는 달리 그리움, 사랑, 기쁨과 같은 서정적인 주제를 바탕으로 한 군상들과 자신의 종교적 신앙을 작품화하고 있다. 특히 제주의 장묘문화의 하나인 동자석의 형태를 차용하여 제작한 순박하고 해학적인 인물상들은 단순하면서도 기도라는 영적인 분위기가 잘 표현된 작품이다. 또한 <이제는 다 이루었다>,<무거운 짐 홀로 맡아 지시고>라는 제목의 작품들에서는 십자가와 같은 종교적 도상이 일부 드러남으로써 투병 생활을 통해 이전보다 더 굳건해진 작가의 종교적 신앙을 간접적으로 짐작케 한다.

 

  

 

 

  사실 종교적 주제의 예술작품들은 관객들에게 객관적인 감상을 흐리게 하거나 작가가 의도한 만큼의 감명을 주지 못하기도 한다. 그러나 허민자 교수의 작품은 일단 형태상에서 조형적인 요소들이 강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작품의 주제보다는 그것이 가진 외형적, 표면적 특징에 더욱 주목하게 된다. 특히 기하학적인 형태와 정으로 쪼은 듯 한 우둘투둘한 표면의 텍스추어는 마치 석조 조각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정착기에 접어든 소지나 유약, 제작기법에 대한 허민자 교수의 기술적 성과는 주제와 상관없이 그의 창작물들을 차별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도자 조각이라는 장르에 대한 작가의 열망과 제주 점토라는 표현 매체의 특성이 반영된 이러한 특징들은 작품의 형식과 내용상에 있어 교묘한 중심을 잡는 역할을 하고 있다.                     

 

 

                                  

 

 

  경기도 이천, 여주의 생활자기, 충남 계룡산 지역의 철화분청, 경상도의 다기(茶器), 전남 강진의 청자 등 전국에는 각 지역의 문화와 전통을 반영하는 도자들이 있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지역에서 생산되는 점토나 유약 재료에 대한 연구는 미비한 수준에 머물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재료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가지고 실제 작품에 활용하는 경우는 소수의 작가에 한정되어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허민자 교수의 제주의 지형이나 지물을 이용한 여러 가지 연구 실적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보여진다. 지역의 향토적인 색채를 특징으로 하는 조형 창작의 가능성을 잘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0여년 만에 서울 나들이를 하는 그의 작품들이 개인적인 신앙을 기반으로 하는 주제였다는 점은 다소 아쉬움으로 남는다. 물론 종교적 신앙 역시 예술 작품의 소재로서 손색이 없지만 타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전시였던 만큼 제주 지역의 진한 향토색을 보여주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더 간절했기 때문일 것이다.

글 / 김 진 아(홍익대학교 도예연구센터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