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성도
캐스팅 -그 다양성의 세계
글/ 엄성도 동덕여자대학교 디지털 공예과 도예전공교수
우리세대의 어렸을 적엔 거의 모두가 그러하듯 나 역시 동네어귀의 공터며 마을 앞 동산의 야트막한 산등성이에서 동네아이들이랑 강아지와 한데 어울려 뒹굴며 자라왔다.
도로포장이 덜 되어있는 신작로라야 겨우 미니버스가 엇갈려 지나갈 정도였다.
비라도 오고 나면 집 앞 모퉁이에 새로 생겨난 실도랑엔 어디서 왔는지 미꾸라지와 붕어새끼가 조약돌 사이로 쏜살같이 헤엄치곤 하였다. 지금처럼 인간과 자연이 구분되어지지 않고 `자연`하면 그 속에 인간의 의미도 당연히 내포되어진 그런 행복한 시대였다.
온통 흙먼지와 땀에 절어 한나절 뛰고 난 산등성이에서 낙동강하구 너머 서편 산으로 침몰하듯 사라지는 태양에 몸도 마음도 온통 노을 빛에 붉게 젖어 들던 기억, 어둠이 드리운 들녘에 조용히 휴식을 취하는 대지의 평화로움, 이러한 기억들은 삶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고 세월을 느끼며 시간의 존재와 정체에 많은 상념을 가지게 하였다.
자연의 경이로움에 벅찬 가슴은 흙을 찾아 생성과 소멸의 비밀을 묻기도 하고 답하기도 하며 의식과 무의식의 형태를 빚어갔다. 흙은 나의 몸이며 곧 우주화 하는 환상을 꿈꾸기도 하였다.
나는 흙을 만짐으로써 나를 생각하고, 우주의 공간과 질서, 그리고 삶 속의 시간의 의미를 생각한다. 흙 작업은 삶의 연장이며 멋진 동반자로서 생명체를 이루는 것이다.
도예를 처음 접한 70년대 말, 다다이즘과 비예술적, 모멸적 의미가 함축된 네오다다의 표현력에서 강한 예술적 충격을 받았다. 달리나 키리코의 슈레알리즘의 초현실적이고 망상적인 장면들은 나의 잠재적 세계와 우주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된다. 당시 초현실적 작품들은 `미`이전에 표현행위로서의 도예를 생각하였고, 기물을 찢고 붙이고 뭉개며 기존의 도예에 반하는 반도예적인 작업들을 통해서 나 자신의 정리되지 못한 조형언어들을 정화시켜왔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행위들은 끓어오르는 열정을 발산시키며 어느 정도 카타르시스를 형성하여 나 자신을 차분히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기도 하였다. 그래서 현재의 나의 작업에서도 일련의 정체성을 갖지 못한 전혀 엉뚱한 작업이 튀어나오기도 하나, 이를 나 자신의 정제작업의 일환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80년대 후반기의 작품은 주로 시공의 개념이나 우주의 탄생에 얽힌 차원의 이동을 의미한 차원여행과 시간여행이라는 명제를 가진 작품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작품의 형태는 육면체와 반구의 형 혹은 그의 변형된 형태에서 시작되었으며 표면장식 역시 기본 입방체의 모양이 3차원의 형태로 본체에 붙여지고 여기에 그림자처럼 2차원의 형태로 연결시켜 표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이 나의 조형언어를 풀어내는 데에 일조한 것은 사실이지만 도예가로서 현실적으로 어느 정도 한계가 있음을 느끼게 되었고 새로운 매체로서 새로운 표현방식을 찾게 되었고 그 결과 석고형을 이용한 캐스팅 작업에 흥미를 가지고 접근하게 되었다.
캐스팅 작업과 제형기를 이용한 성형은 도예를 처음 접한 70년대 후반부터 시작하여 90년대 초반까지 계속 해 왔지만 당시의 작업은 공방 운영을 통한 제품 생산에 치중된 경직된 작업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동안의 기술력의 축적은 90년대 중반 이후 현재까지 계속 되어온 작품 활동의 훌륭한 밑거름이 되고 있다. 도예에 있어서 석고라는 매체는 한 작품에 다양한 물성을 동시에 표현할 수도 있으며 석고 사용형의 일부를 변형하거나 같은 형태의 석고틀에 표현 기법을 다양하게 적용함으로써 다채로운 작품을 제작하는 등 참으로 흥미로운 재료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부산을 터전으로 하였기에 줄곧 바다를 접해왔다. 그런 연유로 바다가 지니는 여러 모습을 보아왔고 바다의 생동감과 푸른 빛은 항상 희망과 용기로서 나의 정신 속에 자리 잡아왔다.
바다의 모습은 내가 꿈꾸어 왔던 우주의 모습과 색깔에서 항상 닮아 있었다. 칠흙 같은 밤하늘의 은하수며 무수한 별자리들이 바다의 일렁이는 파랑과 같고 약간의 두려움과 설레는 경외심을 동반한 대상으로서의 바다나 우주는 끝없는 사고에 대한 유혹으로 다가와 작품 제작의 배경이 될 수 있었으며, 이러한 요인들은 캐스팅을 통한 나의 도예작업에도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캐스팅 작업 시 주로 색 슬립을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전반적인 푸른 계열의 색조는 나의 상상 속의 우주이며 고향 바다와 하늘로 표현되고 있다. 표면 장식은 석고 틀 내부에 색 슬립을 뿌려준다든지 혹은 흩뿌려진 색소지 위에 다른 색상의 슬립을 일정한 두께가 형성되도록 바르고 표현하고자 하는 문양의 형태를 도려낸다든지 하는 작업을 반복적으로 시행하여 생명력 있는 액션페인팅의 효과와 인위적인 기본 도형의 형태가 석고 틀을 때어낸 후 상감이 되어 나타난다. 전통적인 상감법과는 달리 문양이 먼저 만들어진 후 몸체가 제작되기 때문에 본인은 이를 역상감이라 한다.
간혹 사람들은 나의 작품에 대해서 ‘여성적이거나 혹은 너무 꼼꼼해서 완벽주의자 같다’ 라고 얘기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본인의 성격과 작품 제작 태도에도 일부 요인이 있겠지만 캐스팅 작업의 특성이 복합적으로 작용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앞으로도 당분간은 캐스팅 방법의 다양성을 통한 작품을 계속 할 계획이다.
석고 틀의 사용은 일제 시대 이후 반세기 이상 지속되어 왔지만 이를 단순한 복제와 대량 생산의 용도가 아닌 도예작품 제작에 활용되는 경우는 미미하다고 볼 수 있다. 근년에 들어서 산업도자의 의미가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여기고 있다.
방법적인 것은 서구의 형태를 취하고있되 내용은 한국의 전통에 뿌리를 둔 현대적인 표현을 하고 싶으나 현재로서는 이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고 있으며 정신적인 것에서 우리의 정서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물레작업을 할 때보다 캐스팅 작업 시 오히려 더 우리의 옛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월간도예 2000년 4월호
나의 작품세계 - An Artist`s clay World
2002세라믹아트 후지국제비엔날레 대상작
세라믹 아트 후지 국제 비엔날레2002 대상
2002년도에 개최된 세라믹 아트 후지 국제 비엔날레2002는 3회 째를 맞이하는 국제 공모전으로서 일본의 야마나시현의 나가토미 현대공예미술관에서 주최하는 메인이벤트로서 기획 된 전시이며, 격년제의 비엔날레이다. 이 전시는 초대작가부문, 추천작가 부문과 공모작가부문이라는 3개 부문으로 구성되어,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와 국제적으로 활약하고있는 외국인 작가의 작품, 그리고 이후 미래의 도예계를 짊어지고 나갈 신진작가의 현대의 다양한 사회정세와 환경을 반영한 작품군이 전시되었다
2001년 도일 이후, 석고틀을 사용한 주입성형기법의 작품이 과연 평가를 받을 수 있을지 한국의 작가가 추구하는 작업에 관심을 보일지 어떨지, 불안한 시기에 뜻밖의 대상 수상의 소식은, 한국 도조형가로서의 자부심과 함께, 이제부터 작품제작의 방향이 명확해지면서 힘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비엔날레에 출품된 작품「태고의 기억-Ⅱ」는 높이가 50㎝정도 되는 단위체를 2개 연결하여 쌓아올린 형태로서 건축적인 모뉴멘트의 성격이 강해보이는 형을 취하고 있다. 제작 방법은 석고틀을 이용한 주입성형과, 그의 변용된 기법을 사용하였다
일반적인 생각에 의하면 주입성형이라는 방법이 대작을 만들기에는 적합치 않다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으며, 표현적 도예나 작가 개인의 주장이 강한 자유분방한 작품을 제작하는데 있어서는 제약적요소와 함께 사용형 틀을 만들어야 하는 기술적인 부분이 선행되고 해결되지 않으면 쉽게 접근이 힘들기 때문에 기피.되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그런 면이 있기 때문에 더욱더 도전할 가치와 함께 개척되고 추구해 나갈 부분이 많다. 예술이란 결국 타인이 도달하지 못한, 또한 깨닫지 못한 부분을 취해나가는 창조성에 그 생명이 있기에 더 더욱 도전의식이 필요한 것이다.
「태고의 기억-Ⅱ」는 석고 틀 하나의 무게가 50㎏정도에 슬립의 무게가 합쳐지면 100㎏가 넘기 때문에 핸드 리프트나 중장비의 도움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작품이 가지고 있는 컨셉은 생명체의 근원적인 활동에 대한 조형화이며 제작기법은 지극히 현대적인 방법을 취하되 그 근원은 한국의 전통 상감기법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색 슬립을 석고 사용형의 내부에 액션 페인팅처럼 떨어뜨리거나 흩뿌려서 자유로운 곡선이 춤을 추듯 드러나게 하고, 생크림 케잌을 만들 듯 여러 별 모양의 노즐을 통해서 슬립을 쥐어 짜내게 되면 아주 세밀한 부분을 가진 텍스츄어가 가능해 진다. 그 위에 다른 색상의 색 슬립을 두껍게 입혀서. 필요한 부분을 남기고 여분의 슬립은 제거한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여 시행 함으로서 자연적인 곡선과 인위적인 문양의 벨런스를 잘 맞출 수 있다. 마지막은 백색 슬립을 주입하고 건조 후 탈형을 하면 작품의 표면에 상감된 문양이 나타난다. 소성 후 단위체를 사전계획에 의해서 맞추어 쌓아올리면 작품의 제작과정이 끝난다 2개의 기둥이 양쪽에 버티고 서있고 그사이를 파도 치듯 웨이브가 있는 형태가 연결되어있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음과 양의 쌍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의미로서 기둥이 서있고, 웨이브는 서로의 교합이나 왕래의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적층하여 포름을 형성하는 것에 의해 주입성형이 갖는 스케일의 고민을 해결할 수 있고 공간 조형물로서의 존재성을 확보할 수 있다.
유약을 바르지 않은 소성으로 표면에서 느껴지는 감상은 유기체의 온화함이며 여기에 더하여 색 소지의 파스텔톤의 부드러움이 생명감을 더 해주고 있다.
일반적 주입성형이 갖는 핸디캡이 오히려 새로운 표현이 가능 하게끔 되어 신선한 느낌을 주는 것이 좋은 평가를 받은 요인이며 아울러 역상감법이라고 하는 표현기법도 상당한 시간과 기술적인 면의 완성도가 높아야 하기 때문에, 공예적 시각에서 보더라도 무리 없이 높은 평가를 받을 수가 있었다고 판단된다.
2003년, 제5회 아트&크라프트in오보케스기전 대상작
태곳적 풍경 속에 서다, 우주적 자궁과 대면하다
Review. 엄성도전. 3.14-3.20. 동덕아트갤러리
도예는 크게 도기와 도조로 나뉜다. 도기는 용기로서의 그릇에 그 무게중심이 실린 개념이며, 도조는 흙을 재료로 한 입체조형을 통해 그 개념을 풀어낸다. 도기가 도예를 기능면에서 이해하고 있다면, 도조는 이를 재료적인 측면에서 이해하고 접근한다. 이와 함께 도조는 조형성과 형식성(혹은 형상성)에 경사돼 있어서 그 정체성이 사실상 조형예술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도기는 그릇으로 나타난 기능면에 한정돼 있는 탓에 그 운신의 폭이 넓지 않지만 생활 속의 예술 곧 생활미술을 실현한다는 점에서 넓은 의미에서의 조형예술과 맞물린다. 이에 반해 도조는 그 자체가 아예 조형예술의 적극적인 한 형식이며, 이는 소위 현대도예에서 쉽게 확인되는 현상이기도 하다. 물론 도기와 도조의 경계를 허물고 상호내포적인 형상성을 실현한 예도 이제 더 이상 낯설지만은 않다.
엄성도는 이번 전시에서 캐스팅이라는 특유의 방법에 의해 제작된 일련의 도조작품들을 보여주고 있다. 캐스팅은 말할 것도 없이 조각, 판화, 회화를 아우르는 조형예술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문법으로 정착된 것이지만, 도예와 관련해서는 아직 생경한 것이 사실이다. 일반적인 조형예술에서의 캐스팅은 라이프스타일과 라이프사이즈를 통해 마치 현실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 같은 즉물적인 표현을 가능하게 해준다. 이에 반해 도예에서의 캐스팅은 공법이나 재료가 갖는 한계 등 기술적인 제약조건이 상대적으로 크게 작용하는 편이며, 또한 그 프로세스에 대한 기술적인 습득의 과정이 없이는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기도 하다. 엄성도의 이번 전시는 작가가 이런 제약조건을 극복했음을, 그리고 마침내 그 방법을 자기화하는데 성공했음을 확인시켜준다. 작가는 캐스팅을 도예와 도조의 표현영역을 확장시킬 수 있는 계기로 보고 있는 만큼 이는 차후의 작업에서 더 탄력을 받게 될 듯싶다.
엄성도는 이런 캐스팅 공법을 매개로 하여 특유의 형상을 빗어낸다.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그 형상들은 비정형의 원형을 몸통으로 하여 그 표면에 마치 원형생물의 감각촉수와도 같은 무수한 돌기들이 나 있다. 이런 하얀 돌기들과 함께 몸통의 표면에는 청색과 분홍색조의 얼룩 반점들이 나 있어서 한눈에도 살아있는 유기체를 연상시킨다. 이는 마치 원형생물들이 시간이 정지된 듯 정적인 암흑 속을 유영하는 태곳적 풍경과 대면케 한다. 말하자면 그 자체 중성적이고 가치중립적인 전시공간에다 특정의 성격을 부여하여 이를 일종의 상황적 공간 혹은 서사적 공간으로 변형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공간적 점유야말로 조형예술의 중요한 문법 중 하나이며, 작가는 이를 통해 생명을 잉태하고 있는 우주적 자궁 속으로 관객을 인도한다. 보기에 따라서 돌기 형상은 몸통 내부로부터의 에너지의 분출이나 기의 방출을 상기시키며, 이 역시 작가의 작업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인 생명 혹은 생명력의 표출과 통한다.
이로써 작가는 캐스팅으로 나타난 특유의 공법을 통해서, 그리고 조형물의 공간적 점유(공간을 조형요소로 끌어들이는 행위)를 통해서 도예의 장을, 그 표현영역을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고충환(미술평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