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이 철
나는 1991년 첫 번째 개인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작품을 제작하는 데 있어서 성적 욕망이라는 개념을 작품의 핵심 주제로 삼았다. 이와 같은 성적 욕망이라는 핵심 주제를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하려고 했고, 특히 그러한 개념과 작품으로 존재하는 시각물, 즉 도예 작품 사이의 관계 설정에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나의 작품은 지금까지 크게 세 차례의 변화 과정을 겪었다. 이 변화는 작품을 제작할 때 직간접 적으로 영향을 받은 문화적 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1990년대 초반의 초기 작품의 경우는, 미국에서 시작된 현대 도예 운동과, 저항적이고 비판적인 의식을 견지하며 서서히 대두된 1980년대 포스트모더니즘 미술과 민중 미술의 영향 속에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작품들은 기존의 전통적인 도예의 틀을 뛰어 넘어 자유롭고 파격적인 표현을 시도한 현대 도예와 그 맥을 같이 했다. 특히 내 작품은 미국 현대 도예의 흐름 가운데 가장 자유분방하고 파격적인 표현을 보여 주었던 펑크 도예의 경향과 많은 연관성이 있었다. 또한 동 시기의 민중 미술의 흐름 속에서 나 역시 사회적 상황을 비판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고 그러한 시각을 작품으로 연결시키려고 했다.
1990년대 후반에 제작한 시리즈는, 성적 욕망을 사회적 담론과 연결시키려고 했던 초기 작품과는 달리 성적 욕망을 인간의 본능과 연결하여 해석해 내려고 했다.
또한 형식면에서도 초기 작품이 구상적 형태를 통한 상징성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면, 이때의 작품은 기호적 형태를 통한 은유적 방법을 사용하여 제작하였다. 이는 같은 시기 풍부하게 논의되던 성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담론과 미술계에 진지하게 다뤄진 성적 표현을 주제로 한 작품들과 관련이 있는 것이었는데, 나는 특히 물신주의(fetishism)의 담론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이러한 변화는 사회를 향하던, 즉 밖으로 향하던 나의 관심이 반대로 개인의 내면으로 향하게 됨을 말하는 것으로, 향후 작품 제작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 제작한 시리즈는, 초기 작품의 성적 욕망과 관련된 상징성이나 시리즈의 물신주의에 기댄 내면으로 향한 성적이고 은유적 표현 방법의 흔적은 갖고 있다.
그러나 이때부터는 이를 계승하면서도 기표의 중요성을 부각시킨, 다시 말해 작품의 형식적인 면을 극대화하고, 형식 자체를 의미로 만들고자 한 작업을 시작하였다. 작품은 반복의 기법과 비개성화된 표현, 그리고 기의의 중요성을 떨어트리고 기표의 존재감을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제작되었고, 그 결과 성적 욕망의 모든 요소들이 해체되고 비개성적이지만 존재감이 분명한 기표들의 유희만으로 구성된 공간만이 남게 되었다. 이는 이전의 작업과 분명히 구분되는 특징으로, 성숙되고 안정된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의 담론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서, 그 담론을 한층 더 명확한 개념과 표현력으로 표현하려 한 결과였다.
2006년에 전시하는 작품 시리즈는 2005년의 시리즈의 맥을 이으면서 좀더 색다른 형식 실험에 집중하였다. 시리즈는 성적 욕망을 지시하는 시리즈의 은유적 오브제들과는 달리 유기적 형태 자체의 형식적 실험을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주려고 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무엇을 의미하는 기의의 중요성 보다는 형식적·표면적 성분인 기표의 유희를 작업의 핵심으로 하였다. 시리즈는 이러한 맥을 이으면서 시리즈에서 보여준 유기적 형태를 그대로, 또는 다소 변형된 형태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시리즈는 시리즈에서 볼 수 없는 몇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가장 중요한 차이는 형식 실험, 구체적으로 말하면 화려한 페인팅이나 재료상의 실험, 즉 철사와 마이크로 왁스를 이용한 작업과 실험을 절제하였다는 점이다. 작품은 모노톤의 정적인 분위기 속에 인공적 가공 보다는 자연미를 살리고, 크게 그려지는 윤곽보다는 파편화된 오브제들의 다양한 배치와 변환을 통한 유희를 보여준다. 이러한 이유로 작품은 전체적으로 오리엔탈적 분위기를 강하게 풍긴다. 작품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이와 같은 점을 잘 알 수 있다.
우선 시리즈는 화려한 채색이 기조를 이룬 시리즈와 달리 흑과 백을 최대한 활용한 모노톤의 색채 계획으로 일부 작품들을 마무리했다. 모노톤뿐만 아니라 청화백자에서 모티브를 따와 청색을 기조로 한 작품들도 제작했다. 이러한 색채의 활용은 시리즈에서도 실험했던 방식으로, 작품의 형식 자체에 좀 더 집중하게 하면서, 작품 전체를 정적이고 차분하게 마무리 할 수 있게 해 준다. 또한 시리즈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전시 공간에 펼쳐진 파편화된 오브제들을 하나로 모으게 하는 응집력을 가져다주어 전체적으로 무게감과 통일감을 형성하게 하였다.
모노톤의 색채 계획과 함께 시리즈에서는 흙의 재료적 특성을 최대한 살린 작품과 전통석재 장식에서 모티브를 딴 작품, 그리고 자연석의 자연스러운 매력을 충분히 살린 작품도 이전의 작품과 다른 면을 보여준다. 이는 작품의 전통적 또는 동양적 모티브의 도입이라는 차원으로도 해석되겠지만, 그런 특별한 의미보다는 기의의 속박에서 벗어난 기표의 자유로운 유희라는 차원에서, 다시말하면 자유로운 형식 실험의 한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실험은 현대 도예의 실험성에 전통 도예에서 볼 수 있는 형식적 특성을, 마치 날실을 교차시켜 새로운 텍스추어(texture)를 만들 듯 엮어내어 전혀 다른 분위기의 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게 했다.
작품의 전시 방식 또한 변화가 있었는데, 초기 작품, 시리즈, 그리고 시리즈로 이어져 오면서 작품의 개념적 성격은 바뀌어도 일관되게 시도했던 것은 설치 미술의 형식이었다. 시리즈에서도 설치 미술의 형식은 차용하였지만 이와 함께 평면 예술의 전시 방식을 채택하였다는 점이 큰 차이를 보인다. 평면예술의 전시 방식은 시리즈에서도 시도되었지만 시리즈에서는 더욱 평면성을 강조하여 이를 극대화하였다.
또한 시리즈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마치 백화점의 상품 진열대에 진열된 상품들을 보는 듯한, 파편화된 오브제들을 병렬 형식으로 진열하여 전시하는 방식도 시도해 보았다. 이러한 전시 방식은 병렬 형식의 진열 때문에 오브제의 개성을 평균화하고, 무미건조하게 하며, 몰 개성화 한다. 그러면서도 매우 역설적이게도, 하나하나의 유기적 형태의 오브제가 갖고 있는 다양하고 매우 독창적인 형태 때문에, 긴장과 이완을 유도하며 파편화된 오브제들을 결코 손쉽게 하나로 통일할 수 없게 만들어 전시 작품 자체의 개성을 두드러지게 해 준다.
이와 같은 시리즈에서의 자유로운 형식 실험은 앞서 시리즈의 작품을 설명할 때 언급했듯이 기의의 중요성 보다는 기표에 무게를 두고 텍스트 상의 기표의 유희에 핵심을 두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즉, 기의의 중요성이 사라진 상태에서 형식의 맥이 되는 몇 가지 모티브를 활용해 다양하고 자유로운 작품 제작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이것이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의 대두와 함께 20세기 후반에 또 한번 갱신된 현대 미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시리즈에서 나타난 특성을 초기 작품과 시리즈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변화라고 보고 있다. 전에는 작품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의미를 주려고 했던 것에서, 작품 자체의 형식적인 요소만 강조하려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서 작품들을 보면 성적인 욕망을 상징하거나 성적인 욕망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기호인 듯해도, 그 자체의 유기적 형태만 강조되어 있고 또한 이전과는 달리 장식적 요소가 많다.
나는 현대 미술이라는 큰 틀 안에서 도예라는 매체를 통해 인간의 성적 욕망을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해석하고자 하였다. 지금까지 해 왔던 도예 작업을 종합적으로 되돌아 볼 때, 시리즈는 그 시각과 해석에 대한 또다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전시를 통해 접근하게 된 이러한 시도는 향후 다시 새롭게 변할 작품과 그 작업 방향에 새로운 차원의 길을 제시해 줄 것이다
.
글 신이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