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슨 페리
Grayson Perry (1960~,영국)
"내작품은 언제나 게릴라 전술을 취한다.(...)나는 눈으로 보았을 때는 아름다운 예술작품이지만 자세히 관찰하면 어떤 논란이나 이념이 드러나는 것을 만들고 싶다. 이것은 작품에 고유한 문양이나 아름다움을 파괴하겠다는 소리가 아니다. 이념 때문에 미적인 것을 희생시킬 생각은 추호도 없다. 오히려 그 두가지가 매우 가까워져서 행복하게 공존하기를 바란다. 아니,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그 안에 어떤 전율이 생길 것이다." Marjan Boot, Guerilla Tactics
금빛 유령(2000)
그레이슨 페리의 도자기는 동서양의 기형을 여과 없이 베낀 외양만큼이나 표면에 그려진 내용도 혼란스럽다. 빅토리아 시대와 현대의 풍경이 오버랩 되고, 어린아이들의 모습과 포르노그라피 이미지가 뒤섞이는가 하면 평온한 일상과 전쟁의 이미지가 교차한다. 페리에게 2003년 터너상 Turner Prize(영국 테이트 브리튼이 1984년 제정한 현대미술상. 매해 12월 수상자를 선정하며 한 해 동안 가장 주목할 만한 전시나 프로젝트를 보여준 50세 미만의 영국 미술가에게 수여된다.)의 수상의 영광을 안겨준 <금빛 유령Golden Ghosts(2000)>과 <당신 아이의 시체를 발견 했소We've Found the Body of Your Child(2000)>의 주인공은 모두 불행에 처한 어린이들이다. <금빛 유령>에서는 두 손이 잘린 채 피를 뚝뚝 흘리고 있거나 무언가를 상실한 듯 공허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여자 아이들이 등장 한다. 그리고 목가적인 풍경과 대조적으로 작은 관들이 패턴처럼 화면 한편을 뒤덮고 있다.
당신 아이의 시체를 발견 했소 (2000)
여기에 뜬금없이 원피스 차림의 한 소녀가 뜬금없이 유령처럼 등장하여 불길한 꿈같은 인상마저 준다. 이러한 무거운 분위기는 <당신 아이의 시체를 발견 했소>에도 이어진다. 차가운 눈밭에서 어른들이 실종된 아이를 찾아 애타게 이름을 불러 보지만 아이의 죽음은 이미 제목에 예고되어 있다. 이처럼 겉으로 화려해 보이는 페리의 도자기 작품은 너무나 어둡고 잔인한 내용을 담고 있다.
페리는 터너상 시상식에서 연보라 빛 바탕에 토끼, 장미, 하트가 예쁘게 수놓아진 사랑스런 원피스 차림으로 단상에 올라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하얀 발목 양말에 빨간 체리구두를 신고 단발머리에 리본까지 한 기괴한 차림의 남성인 페리가 '클레어'라는 이름의 여성으로 변신할 때 즐기는 드레스 코드다.
클레어로 변신한 그레이슨 페리
도자기 표면의 그림 속에 곧잘 등장하는 소녀도 작가 분신인 클레어다. 2000년 클레어 드레스를 비롯해 자전적 내용의 작품으로 구성된 개인전을 통해 복장 도착자로서 커밍아웃한 페리는 터너상 수상 당시 대중과 언론으로부터 심한 인신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점차 그의 삶과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늘러 가면서 이제는 영국 미술의 진정한 다양성과 사회 전반의 성적 소수자를 대표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일곱 살 때 어머니의 외도로 아버지가 집을 나간 뒤로, 어린 페리는 폭력과 폭언을 일삼던 계부를 피해 홀로 침대 구석에 숨어 공상의 세계에 빠져들곤 했다.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 중 하나인 조그만 테디 베어로 상실감을 달래던 그는 십대에 접어들면서 누이의 옷을 훔쳐 입고 서는 예쁘고 사랑스런 여자아이가 되는 성적 환상을 즐기기 시작했다. 작가의 클레어라는 캐릭터는 이때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페리의 부모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그는 19세가 되던 해에 가족을 떠나게 된다. 그의 도자기를 뒤덮고 있는 비참한 아이들의 모습과 거친 욕설들은 가정폭력과 아동학대로 점철된 유년기 어두운 기억의 단편들이다. 2006년 링컨셔라는 작은 도시의 한 박물관에서 이루어진 <<링컨셔의 매력The Charms of Lincolnshire>>이라는 제목의 전시는 한 번도 일반에게 공개 된 적 없던 사냥용 덫, 영구차, 태피스트리, 인형, 빛바랜 흑백사진 등 주로 빅토리아 시대의 민속공예품으로 이루어진 잡다한 컬렉션을 재해석하여 자신의 작품과 함께 전시한 것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여인으로 분장한 자신의 초상사진, 이케아IKEA나 노키아NOKIA같은 다국적 기업의 브랜드 네임이 새겨진 접시, 외설적인 이미지와 세속적인 사랑을 노래한 시구로 이루어진 자수, 그리고 현대의 바이블인 구글google 사이트에서 발췌한 로고와 문구로 뒤덮인 도자기 등은 음침한 박물관 유물과 능청스럽게도 잘 어울렸다.
Art loves to be challenged
박수아/홍익대학교 도예연구소 연구원
“예술의 세계는 도전자를 환영한다. 그것이 바로 예술세계가 가진 멋진 점의 하나이다. 예술의 세계는 ‘제발 우리에게 충격을 줘. 우리를 편하지 않게 해줘. 그런 것들은 재미있고 흥분되니까’라고 하며 기대하고 기다리고 있다...”(BBC 인터뷰 중에서)
영국 작가 그레이슨 페리의 BBC와의 인터뷰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2003년, 테이트 브리튼갤러리의 터너상을 수상한 그는 시상식에 여성의 옷차림으로 등장하여 모두를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결코 평범하지 않은 그의 작업세계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본다.
순수미술과 도예
그는 도자기를 캔버스로 사용한다. 다시 말하면 항아리와 같은 전형적 형태의 도자기 위에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리거나 장식하여 표현한다. 이러한 방법은 다른 도예가들의 작업에서도 종종 찾아볼 수 있는데, 그의 작업과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다른 도예가들의 작업이 도자기의 형태와 문양, 두 요소를 같은 비중으로 탐구하고 적절히 활용하여 시너지효과를 창출해내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다면, 페리의 작품에서는 도자기의 형태는 부수적인 요소이며 표면에 장식된 문양이 그의 이야기를 나타내는 주요수단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글의 서두에서 '그는 장식성이 강한 도자기를 만든다'가 아닌 '도자기를 캔버스로 사용한다'고 표현하였고,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스스로를 '단지 도자기를 만드는 일을 벌이는 아티스트'이며 '전형적인 도예가와는 다르다'라고 진술한다.
장식과 이야기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 필름, 자수, 손으로 쓴 텍스트, 레터링 등을 조합하는 콜라쥬기법을 이용한다. 이렇듯 다양한 매체를 이용하고 탐구하는 것은 젊은 시절, 퍼포먼스 등의 분야에 심취했던 그의 경험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하지만, 순수미술의 행위의 영역을 테스트하려는 시도라고도 보여진다.
다채로운 색채의 그림과 텍스트 등으로 가득 찬 그의 작품은 언뜻 보면 만화처럼 가벼운 느낌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외관 안쪽에는 어둡고 무거운 주제가 감추어져 있다. 그의 작품의 소재는 분노나 죽음, 또는 자서전적 소재의 두 가지로 분류되는데 어느 쪽도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다. 특히 아동학대에 관한 장면이 많은 것으로 보아 그의 유년시절이 그리 행복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위에서 시상식에 여성복장으로 등장했다는 것을 잠깐 언급하였다. 사실 그는 이성복장도착자(transvestite)이다. 유년시절의 그는 매우 예민한 어린이였고, 언제부터인가 여성적 성향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한 성향을 분출하고자 하는 욕구와 사회적 통념 사이에서 고민하던 그는 십대 때부터 여자옷을 입기 시작했고, 15세 이후 가족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된 이후부터는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힘든 시기를 겪었다고 한다.
복장도착증과 작업
그러나 그는 복장도착자라는 특이한 성향과 그의 작업 사이에서의 어떤 연결고리를 찾아내려는 사람들의 기대를 무너뜨린다. 보통의 작가들이 그렇듯 스스로 생각하고 자극받고 영향받은 것을 작업의 소재로 삼고 관객이 읽어내길 바란다. 그의 옷 입는 성향은 예술과도, 그의 작업과도 관계가 없다고 한다. 그가 여자옷을 입기 시작했을 때에는 복장도착자라는 것에 대해 알지 못했던 때이고, 예술이란 것에 대해서도 몰랐던 때이다. 그저 그 행위를 즐겼던 것뿐이었다.
순수미술과 도예, 가벼운 장식과 무거운 주제, 거기에 독특한 취향까지 더하여져 그의 작업이 구성하는 모든 것이 조화롭지 못하게 맞물려 있는 듯하다. 그것에 관해 어울리지 않는 요소들의 하나하나를 설명하고 이해시키려 하지 않고, '예술의 세계는 도전자를 환영한다'는 말로 간단히 해결해버린다. 평범하지 않은 것을 평범하게 받아들이는 것, 그것은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의 평범하지 않은 성향에 대응해야 했던 그가 익힐 수 있었던 대처방법일 것이다.
Dolls at Dungeness September 11, 2001 (2001)
The Chelmsford Sissies(2003)
Quotoes from the Internet(2005)
In Praise of Shadows(2005)
Poverty Chinoiserie(2003)
Vase Using My Family(1998)
Pot based on twenty years old collage(2006)
드레스를 입은 도공 그레이슨 페리의 화려한 치장은 어두운 과거의 아픔과 상처를 감추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통을 통해 치유하기 위한 것이다. 사실 남성이면서도 여성 행세를 하고, 현대미술의 변방으로 밀려난 도예작업을 하며, 저급하고 진부한 소재를 예술에 끌어들인 것에 대해 작가는 스스로 규정한 '이류' 또는 '약자'라는 자기 정체성과 통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클레어는 여자 옷을 입은 나 자신"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당당하게 사랑하는 용기는 그가 더 이상 이류나 약자가 아님을 증명한다.
가스클락(번역 김수진)「현대도예의 탄생 / 예술가들」,(서울:현실문화,2012)
임근혜, 「창조의 제국」,(서울:지안,20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