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로 말하자면, 지난 2년간의 미국생활은 홀로 던져진 나를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새로운 도자'에 대한 기대를 깨닫기까지 많은 좌절과 고통을 내게 주었다. 처음 내게 있어서 새로운 도자란 저화도 소성기법, 펑크(Funk), 팝(Pop), 현란한 색채, 상업적으로 만들어져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들, 미술의 제 경향에 대한 민감한 반응, 그리고 그 결과로 이루어진 표현의 다양성 등 미국 도자의 객관적인 결과들이었다. 한동안 나는 새로운 재료, 새로운 테크닉과 방법, 새로운 시각, 새로운 환경에 둘러싸여 심한 정보의 과포화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내 예술의 새로운 인식에 대한 기대는 새로운 재료, 새로운 테크닉에 의하여 이루어질 수 없음을 극심한 좌절과 자기비판을 통하여 깨닫게 되었다. 새삼스럽게도 예술은 테크닉의 저 너머에 있음을 알았다. 새로움이란 낡은 것으로부터의 단절이 아니다. 낡은 것으로부터 유리된, 절연된 새로움이란 가능할까? 테드 랜달(Ted Randall)의 다음 말은 음미할 만하다.

"과거 나는 언제나 아무도 여태껏 본적이 없는 도자기를 만들려고 애썼다. 나는 단지 새로운 종류의 도자기 형태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지금 더 이상 새로운 것에 대하여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내게 있어서 모든 의미는 뒤를 향해 바라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당신이 눈앞에 뻗어있는 길 위에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보면서, 또 이 순간 당신이 어디에 있는가를 아는 것은 백밀러가 있기 때문이다. 이 과거라는 백밀러를 통해서 당신은 현재와 경험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만약 당신이 어떤 사물로부터 어떤 의미를 발견한다면, 그것은 곧 당신이 현재 이 순간과 과거의 무엇과의 연관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의미란 현재와 과거와의 사이에 존재한다."

하여, 나는 과거 - 나의 지난 경험과 작품 그리고 미술사 속의 작품들 - 를 돌아보았다. 나는 현재와 과거의 내 작품 속에 잇닿아 있는 공통의 실마리를 찾아 이것을 새로운 시각경험과 환경에 연결시켜 그들이 연관관계를 시각화하고자 노력했다. 여기에 실린 몇 개의 작품들은 이러한 나의 현재와 과거와의 충돌과 시각적·지적 환경에 대한 나의 과거와 현재의 인식을 관련 지음으로 말미암은 변증법적인 과정을 실체화한 것들이다. 神(신)이 보기에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을지라도 내게는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하는 듯이 보인다. 마치 어린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듯이, 해마다 피는 꽃은 꼭 같건만 만나는 사람들은 달라진다고 옛 시인은 읊었다. 우리의 문화는 세대와 세대를 이어오면서 변화해 왔다. 어떤 세상, 어느 대를 막론하고 변화는 사회의 전통이다 만물은 유전하는 것, 그러나 그 본질도 변하는 것일까? 나는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기 위하여 끊임없이 변화하고자 노력한다. 또한 나는 불변의 무엇을 찾기 위하여 변화하는 무엇을 찾으려 노력한다.

알·잉태·출생·생명, 꿈틀거리며 얽힌 균열의 선들, 점토의 색상과 질감, 이런 것들을 지난 수년간 내가 작업을 하면서 염두에 두었던 아이디어들이었다. 나는 이들을 분석하고 종합하여 내 작품에 시각적이고 개념적인 구조를 주고자 했다. 만약 현재와 과거와의 사이에 의미가 존재한다면, 또 만약 내가 이 사회의 구조나 우주의 법칙이라는 커다란 바퀴 속의 한 개 톱니라고 한다면 나의 감성과 예술행위는 내가 몸담고 있는 환경에 대응하여 변할 것이 아닌가!

"나는 내 작품이 새롭고 혁신적이기를 바라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수 천년의 과거까지 거슬러 닿아 있으면서 현재 속에서 살아 숨쉬는 생명력을 가진 하나의 연속체의 일부분이 되는 것이다." - 웨이 히그비(Wyne Higby) 표면의 텍스츄어가 과정되어 구조가 되고 또 이중의 기벽 사이에는 실제의 공간이 형성된다. 텍스츄어가 삼차원적인 구조가 될 때 하나의 항아리(pot)는 기(器, vessel)의 개념을 갖게 된다. 현대적 의미의 기는 단지 실용적인 기능의 문제에 의하여 구애받지 않는 개인적이고 예술적인 상상력을 표현하기 위하여 과장된 그릇의 형태의 본질을 제시하는 것이 아닌가!

장례용 혹은 의식용의 항아리는 언제나 기라고 불리었다. 중국 상(商)시대의 청동기는 결코 항아리라고 불리지는 않았다. 이와 같이 항아리가 기가 되고 또 그 기의 구조적 변용 과정을 통하여 그 형태의 근원과 활기 넘친 생명의 몸짓을 시각화하려고 했다.

자연은 발견할 수 있는 눈을 가진 자에게 언제나 문을 열어둔 보물창고이다.

"자연을 관찰함은 예술가의 생활의 일부분이다. 그것은 형태에 대한 지식을 넓혀 주며, 오직 공식에 의한 작업으로부터 예술가를 항상 신선하게 지켜 주며 영감을 제공한다." - 헨리 무어(Henry Moore)

진흙 바닥의 표면에는 끝없이 얽힌 균열의 산이 있다. 거기에는 일정한 중심도 방향도 없다. 그들 선은 정지해 있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인다. 그것은 살아있는 선이다. 나는 그것을 움직이는 구조로 본다. 그것은 살아있는 구조이다. 그것은 변화하는 구조이다.

바다조개는 자연이 내린 특별한 은총이다. 그 형태, 색채, 구조, 질감의 여러 양태는 무한하다. 그 중에서도 뿔 모양의 조개(cone shell)의 형태를 나는 좋아한다. 그 딱딱한 껍질은 뼈대 이상의 무엇을 암시하며, 황홀한 색채와 유기적인 구조에서 생명이 거주함직한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바다 밑 거미줄같이 얽히고 설킨 거대한 생명체의 구조인 산호는 우리에게 경이로운 형태와 색채를 보여준다. 이 물 속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살아 움직이는 듯이 보인다. 산호의 돌출한 융기는 균열의 망목을 연상시키며 또 여기에서는 이차원과 삼차원의 경계가 모호한 착시적인 효과를 볼 수 있다.

현미경을 통해 볼 수 있는 미시적인 자연의 세계는 거대한 우주와 마찬가지로 신비와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다. 이 극소의 세계에서 우리는 생명의 기본구조와 자연의 함축된 형태와 만나게 된다. 분자 구조, DNA의 이중나선 구조, 플랭크톤의 이중 구조는 어떤 필연적인 기능을 가진 형태이겠지만 동시에 아름다운 형태이다. 이들 미시의 세계를 확대하고 변형함으로써 단순한 자연의 확대된 복제품이 아닌, 다른 의미를 지닌 전혀 새로운 구조를 만들 수는 없을까?

헨리 무어(Henry Moore), 한스 아르프(Hans Arp), 이브람 라소(Ibram Lassaw)등 바이탈리스트(vitalist)의 작품에서도 나는 유기적인 형태와 구조를 본다. 그들의 조각은 단순히 하나의 덩어리와 그것을 둘러싼 공간의 소극적인 병치가 아니라, 덩어리와 공간이 서로 넘나들고 휘감고 있어 마치 자라나는 생명체와 같은 움직이는 구조를 갖고 있다.

석기시대의 토기에 장식된 빗살무늬나 승문(繩文) 토기에서 볼 수 있는 매듭의 격렬한 얽힘, 또 투각된 신라 토기나 청자향로 등에서도 나는 이들을 기하학적인 문양으로보다는 기벽 자체에 공간을 포용하고 있는 구조로 해석한다. 뿔 모양의 조개 모습과 비슷한 첨저형(尖底形)의 토기들은 거꾸로 서 있는 피라밋처럼 긴장감을 준다.

나는 이들 구조의 변화해 가는 과정을 통하여 기의 생명감을 나타내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자연의 흉내나 속임수가 아닌 진정한 조형적 은유(metaphor)로 나타나기를 원한다. 器(기)가 자연의 메타포이고 다시 이를 메타포함으로써 도자가 가진 독특한 형태미를 추구한다. 도자의 의식적(意識的) 기능과 그에 걸맞는 형태의 몸짓을 찾고자 한다. 에너지, 생명, 움직임, 호기심, 의식, 과장된 몸짓 등의 말들이 이들 작품들을 만들면서 생각하던 개념들이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같이 찍은 사진 속에서 오랜 세월 변해온 나를 찾을 수 있도록 하는 나의 본래의 모습처럼 내 작품도 형태와 구조의 변용 과정을 거치면서도 변하지 않는 본래의 모습을 갖고 있기를 바란다.

나는 불변의 것을 찾기 위하여 변화하는 것을 찾을 것이며 나 자신 변할 것이다. 이미 이루어진 것은 또 다른 시작을 위한 바탕이며, 하나의 정리는 또 다른 하나의 가설이 되며, 하나의 전통은 또 다른 하나의 혁신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