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 진 희
내적 풍경의 번안물로서의 도조작업
1980년 대학원 시절부터 도자조형 작업으로 방향을 정하고 꾸준히 한 방향으로 작업을 해왔다. 80년대 초기에는 주로 도판작업 위주로 진행하여 나의 일상사와 사회를 포함한 주변사들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였다고 생각이 된다. 주로 도벽이나 점토판을 덧붙인 건물의 입체구조물 형식(연극 무대 같은) 등으로 표현하였다. 또한 다양한 방법(다양한 점토의 이장 주입성형 후 변형, 톱밥 소성 등)을 통하여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평소에 일기처럼 드로잉을 해놓고 그 시기의 나의 주제에 따라 그림을 택하게 된다. 주로 도판에 덧붙이거나 각을 하거나 하여 초벌 후에 무채색 톤과 파스텔 톤의 안료를 수채화처럼 붓으로 바르고 지우고 덧바르고 한다. 그후 투명유를 살짝 스프레이하여 소성(1250 )한다. 지금도 이 방법을 유지하고 있다. 이것은 내 자신이 점토의 아주 세밀한 긁힌 자국마저도 남기고 싶은 마음에서 두껍고 불투명한 유약이 도판의 표면을 완전히 덮어버리는 것을 배제하기 위함이다.
1990년대에는 예전의 작업방향을 유지하는 가운데 다양한 종류의 질감과 색채를 가진 점토를 좀더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토템이나 모뉴먼트를 연상시키는 숨통 시리즈를 기둥모양(높이 230 - 270 (cm))으로 제작하게 된다. 멀리서 보면 밋밋한 붉은 기와 색의 기둥이나 가까이 보면 매 층이 다른 질감과 소금과 연으로 그을린 모습을 보게되는 식의 작업을 하다가 이후에는 나의 주변의 자연의 생태(기후, 동물, 식물, 곤충 등)의 모습들을 그 위에 얹게 되었다.
현재도 전반적으로 점토의 질감과 표면의 세밀한 효과를 통하여 다양한 일상사와 나와의 교감을 표현하고자하며 표현기법을 유지해나가고 있다. 색화장토와 안료를 부분적으로 복합 활용한다. 생활 속 가까이 조형작품이 놓일 수 있도록 -나의 작업소재중의 하나인- 거울 및 작은 도벽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흙을 이용한 일상의 형상화'라고 할 만한 그의 도판 및 도조작업은 단순하고 소박하면서도 어떠한 왜곡이나 분칠없이 자신의 구체적인 삶의 다양한 양태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또한 관자의 시선을 그 '일상의 공간'으로 끌어들여 차분한 가운데 깊은 파장을 동반하는 감동을 넌지시 전해주고 있다.
그러나 그의 작업 표면을 이지적이고 냉철한 시선의 '부드러운 비애'가 감싸고 덮어줌에 따라 작품전체에는 '잔잔한 서정과 지독한 삶에의 응시'가 동시에 감지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작업을 일상의 소박한 재현 내지 꾸며진 차원과는 다른 느낌의 깊이를 전해주고 있는 듯하다. 그 같은 깊이는 삶의 한 가운데서 가슴 속에 오랫동안 겹겹이 쌓아왔을 많은 지각들의 축적과 그것을 통합해서 투영화 시킬 수 있는 의식의 융합, 구리고 성숙한 인간으로서, 여성으로서의 자기탐색으로 인해 가능한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작업은 바로 개인적 삶에 대한 성실한 독백에 다름 아니다. 도조의 형식은 따라서 '자신의 삶에 다가가기 위한 충실한 통로이자 매우 적절한 장치'인 것이다.
이같은 작가의 사유는 현대도예의 방법론적 측면을 적극 구사하면서도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고 자신의 삶의 중심을 잡아나가는 '작가정신'을 잃지 않으려는 욕구의 표명이다. 그래서 흙을 만지는 것으로부터 자신의 감정과 사유를 성형하는 작가는 기법에 대한 끈질긴 실험과 조형적 탐색을 동반하면서 관조적 거리나 정신적 깊이에서 우러난 형상을 함께 보여주고 있다. 회화로서의 밀도나 영상적인 맛을 지니고 있으면서 흙이란 매체가 가진 정서적인 부분 또한 잘 소화해내고 있는 그의 작업은 다름 아닌 '내면적 풍경의 투사'로서의 도조작업인 것이다.
글 / 박영택
('93 월간미술공예 오늘의 작가, 도예가 전진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