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린의 도예, 그 환상적인 아름다움
신항섭 / 미술평론가
예술은 마약과 같은 것이다. 예술세계에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결코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설령 어쩔 수 없는 사정에 의해 창작활동을 중단하게 되는 경우일지라도 예술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가 될 수는 없다. 예술은 예술가의 행위를 주도하는데 그치지 않고 정신 및 감정까지 포박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가는 기꺼이 예술의 노예가 되고자 한다. 진정한 창작에 대한 예술의 보상, 그 환상적인 쾌감을 결코 잊을 수 없는 까닭이다.
이린의 최근 작업을 보면서 예술이 가지고 잇는 마력, 그 모호한 정체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예술은 인간의 창조적인 사고 및 감정이 극도로 고조됨과 동시에 고도로 훈련된 신체적인 기능이 절정을 이루고 있을 때 이루어지는 어떤 것이다. 따라서 예술창작이란 이제까지 우리가 부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임을 알 수 있다. 작가 자신이 행위를 주도하면서도 그 최종적인 결과를 정확히 예측하기 어려운 것은 예술이란 생물과 같은 생명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예술가는 행위를 주도하는 창조적인 사고에 의해 장차 이루어질 최종적인 상태를 예상하여 그에 가장 가깝게 다가가도록 치밀하게 계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인 결과는 언제나 예술가 자신의 예상에 정확히 응답하지 않는다.
삶 중에서(Life Series) 62×54×9cm
그런 점에서 보면 도자기야말로 가장 불확실한 작업이다. 아무리 오랜 경험에 의한 자기만의 데이터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번번이 그 데이터마저 배반하는 것이 가마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예작가들은 언제나 창작의 절반은 가마에게 맡기는 것을 숙명으로 여긴다. 이른바 요변에 절반을 일임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 요변이야말로 도예의 길로 빠져들게 하는 마력인지도 모른다.
그는 물레를 돌려 그릇을 만드는가 하면 조각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도조작업도 병행한다. 그러나 전체적인 모습은 창작도예가로서의 입장에 선다. 무엇보다도 그릇이라는 생활용기로서의 용도를 크게 의식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도예 본연의 길로부터 한 걸음 벗어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가 도예작업을 통해 구현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도예의 영역의 확장 또는 도예의 지평을 넓히는 일이다. 도예에 대한 일체의 고정관념을 넘어선 지점에 자신을 세우려는 것이다.
그는 미국에서 공부함으로써 한국 전통도자기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적어도 한국에서 도예작가로서 활동하려면 어떤 식으로든지 전통 도자기의 맥락으로 이해하려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무엇보다도 유약에서 전통도자기와는 직접적인 연관서이 없기에 그렇다.
삶 중에서(Life Series) 62×54×9cm
그는 미국 유학을 통해 배운 사실을 기반으로 하여 독자적인 노력에 의해 새로운 유약의 사용법을 고안해 냈다. 액체 형태로 쓰는 일반적인 유약 사용방식을 탈피하여 고체형태로 만들어 전혀 새로운 표면효과를 얻게 된 것이다. 귀국한 이후 3년이 넘도록 고체형태의 유약이 나타낼 수 있는 다양한 표면효과에 대해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그 결과 이전에는 누구도 표현하지 못한, 상감기법과 유사한 독특한 형태의 문양을 만들어내게 된 것이다.
그동안 그는 생명의 신비를 관능적인 이미지와 결부시켜 그릇과 유사한 독특한 이미지의 도조작업을 해 왔다. 그릇 따위의 생활기물로서의 효용성보다는 유약이 만들어내는 특이한 표면효과와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도조의 개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더불어 평판을 만들어 그 표면에 역시 다양한 이미지를 시문하는 따위의 작업도 병행해 왔다. 벽걸이용으로 만들어진 평판 작업은 어쩌면 회화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형태미보다는 평판의 시문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화 12호의 정도의 크기를 가진 평판에 마치 점묘법과 같은 전혀 새로운 시문을 하고 있는 최근의 작업은 놀랄만한 성과를 보여준다. 이전까지는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전혀 새로운 표현이 출현한 것이다. 어느 면에서는 분청사기의 인화문과 유사하다는 인상이지만 제작기법이라든가 내용에서 전혀 다른 방식이다. 제작기법으로는 인화문과 정반대의 입장에 선다. 그의 경우 유약을 도드라지게 시문하기 때문에 양각의 형태가 되는 것이다. 이에 비해 인화문은 음각의 형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두운 바탕에 무수한 하얀색의 점이 반복적으로 나열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인화문과 크게 다르지 않게 보인다.
삶 중에서(Life Series) 62×54×9cm
벽걸이용 평판작업은 이제까지와는 비교대상이 없을 만큼 독자적인 발상과 제작기법에 의해 새로운 도예의 지평을 열고 있다. 눈에 보이는 사실만을 그대로 기술하자면 고려상감문양청자나 청화백자 또는 분청사기 따위의 전통적인 채색재료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채색재료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 특이하다. 그런데도 무수한 검은색 바탕 위에 흰 점이 찍혀 있다. 붓으로 그린 것 같지도 않거니와 그렇다고 해서 인화기법이나 상감기법을 활용한 것 같지도 않다. 흰색의 반점들은 도자기의 피부 그 자체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철화, 청화, 진사 따위의 채색재료로 시문을 한다거나 인화기법 및 상감기법을 활용하는 따위의 전통적인 문양기법에 대한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검은색 바탕 위에 희색의 안료가 야간 도드라지는 형태로 얹혀져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흰색의 채색재료는 청화와는 달리 그 자체로 부피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작업과정을 보면 이 흰색의 채색재료(또는 유약)는 거의 고체형태로 되어 있다. 마치 치약과 같은 형태인 것이다. 전통적인 채색재료인 철화, 청화, 진사 따위는 물에 풀어 액체형태로 쓰는 데 비해 튜브나 주사기에 넣어 시문한다. 그리고 가마에 들어가 불에 녹으면서 마침내 유약으로서의 성격이 드러난다. 다시 말해 그가 개발한 채색재료는 유약의 일종인 셈이다. 채색재료이면서 유약이라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독특한 성질을 가진 채색안료이자 유약 성분을 가진 재료는 시문하는데 아주 편리하다. 주사기를 사용할 경우에는 거의 균일한 형태의 점과 선을 만들어낼 수 있을 정도이다. 최근 작업에서 보여주는 작은 점들의 연속적인 배열은 이와 같은 시문시법의 효과인 것이다. 수를 놓듯 주사기로 한 점 한 점 유약을 찍어나가면 흡사 작은 알갱이의 진주를 일정한 간격으로 나열해 놓은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작은 알갱이들이 가마 속으로 들어가면 그 본래의 형체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만다. 대신에 검은 색 바탕의 판 위에 녹아내려 흡착되고 만다. 일반적인 전통도자기의 유약이 그렇듯이 표면을 덮으면서 판과 일체가 되는 것이다.
가마에서 나온 뒤의 표정이야말로 요술이다. 요변으로 인해 상상하지 못한 한 장의 추상적인 그림으로 탈바꿈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의 일정한 간격으로 찌어나간 점들의 모양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은 고사하고라도 전혀 예기치 못한 그림이 나타난다. 뾰족한 산봉우리가 불현듯 치솟으면서 한 폭의 멋진 수묵산수를 그려내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기막히게 아름다운 추상적인 이미지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물론 유약의 성질을 잘 알고 있을뿐더러 판의 표면상태에 따라 다양한 표정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로서는 그 최종적인 이미지가 어떻게 전개되리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가마 속에서 일어나는 불의 작용은 언제나 예상을 빗나가기 마련이다. 그는 어쩌면 이 요변에 매혹되어 흙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지 모른다.
삶 중에서(Life Series) 62×54×9cm
대형 평판에 펼쳐지는 흑백의 조화는 가히 꿈과 같다. 밤하늘에 뿌려지는 무수한 별들처럼 보이기도 한다. 검은 색 바탕 위에 흰색의 점들이 아주 단정한 모양으로, 또는 유약이 녹으면서 자연스럽게 일그러진 진주모양으로, 그리고 때로는 기묘한 선으로 변조되고 있다. 이들 여러 형태의 흰색 이미지들이 전개하는 합주는 우주의 쇼처럼 환상적이다. 무수한 불씨들이 저마다의 목소리를 내며 밤하늘을 찬란하게 수놓는 은하의 축제 또는 폭죽놀이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점이 이처럼 아름답게 형상화되고 있음을 일찍이 본 일이 없다. 점묘법의 그림과도 비교될 수 없는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질서가 숨을 막히게 한다. 무엇보다도 도자기만이 지어낼 수 있는 그 차갑고도 매끄러운 감촉의 피부가 지닌 고상한 아름다움에 취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여인의 부드러운 속살과도 같은 도자기 표면에 주어진 감정의 흡착력이야말로 기존의 평면회화에서도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부분이다.
도자기의 그림은 흙과 유약이 하나의 몸체를 가진 이미지이다. 물감과 캔버스가 일체화될 수 없는 관계라면 도자기의 흙과 유약은 언제나 일체가 된다. 그 영속적인 결속은 숙명적인 관계를 의미한다. 그러기에 고착된 이미지가 가지는 진정성은 도자기화의 또 다른 특징이다. 그의 평판화는 도자기로서의 무기질적인 감정에서 탈피한다. 조형적인 순정이 있는 것이다. 수정되지 않은 조형적인 순결성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미묘한 감정의 이입을 허락하는 것이다.
그의 평판작업은 그의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한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다. 평판의 표면에 요철의 표정을 주는 것만으로도 예상하기 어려운 다양한 이미지를 얻을 수 있다. 그 요철의 굴곡에 따라 작은 알갱이의 유약이 녹아 내리면서 다양한 표정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렇듯이 판의 표면의 변화와 유약의 크기 정도에 따라 얼마든지 다채로운 이미지를 얻을 수 있다. 물론 추상적인 이미지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형태의 구상적인 이미지도 가능하다.
아무튼 자그마한 진주알갱이를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하여 평판을 채우는 작업의 그 단조로움이 이처럼 아름다운 세상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단순하게 반복되는 지루한 행위의 과정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아마도 모든 생각을 놓아버렸을지도 모른다. 일체의 세상사로부터 절연된 그 무심의 경지에 들어가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다고 해서 그 무심은 의식의 진공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의식이 관통하는 직관의 세계로의 진입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삶 중에서(Life Series) 62×54×9cm
그처럼 반복적인 행위의 결과로서 점들이 지어내는 환상적인 표정은 불의 조화일 수밖에 없다. 그 점들은 불에 의해 태어났지만 서로간에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리듬을 형성한다. 마치 작은 생명체들이 꼬물거리는 듯하다. 이는 단순히 시각적인 착각이 아니라 생명의 기운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 도자기 표면에 생명의 기운을 불러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손을 떠나 불이라는 존재에 의해 이루어진 그 아름다운 생명의 조화 또는 화음은 인간이 지어낼 수 있는 최상의 환희이다. 인간이 이 지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 절묘한 화음은 예술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준다. 자연미와는 다른 인간의 의식과 불의 화합물인 셈이다. 우리는 그가 주도한 그 인위적인 아름다운 세상을 통해 다시 한번 인간이 지상에 존재해야 되는 명백한 이유를 확인하게 된다. 즉, 예술은 세상에 대한 인간의 화해의 손짓인 것이다.
삶 중에서(Life Series) 62×54×9cm
그의 평판작업에서 또 다른 의미의 회화세계를 본다, 장르의 개념에 얽매이지 않는다면 그대로 새로운 형태의 평면회화와 다를 바 없는 까닭이다. 현대회화에서 구체적인 이미지를 추구하지 않으면서 단순히 점만을 나열하는 식의 표현형식을 심심찮게 보아온 우리로서는 그의 평판작업에서 손의 기능을 뛰어넘는 새로운 개념의 회화세계가 전개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완전재료로서의 도자기 재료가 가지고 있는 그 보존성의 문제에서는 또 다른 시각에서의 회화적인 영역의 확장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 않을까.
도자기에 대한 우리의 도정관념 및 선입관을 걷어낸다면 그의 평판 작업은 확실히 새로운 회화의 제안이라고 할 만 하다. 인위적이면서도 그 평판화에는 인간의 지적인 조작이나 감정이 개입되니 않는 부분이 이다. 바꾸어 말해 불의 조화가 만들어낸 신비적인 요소가 있는 것이다. 그 신비적인 요소가 우리를 매료시킨다. 이제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또 다른 형태의 조형적인 세계와의 만남에 우리의 미적 감수성이 흔들리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