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예가 조정현
글/정병관(현대미술사가, 전 이화여대 교수)
조정현은 1940년 생으로 '63년 이화여대와 '66년 동 대학원, '76년 미국 남 일리노이대학 대학원을 졸업했다. '81년 미국 웨인 스테이트 대학 초청교수로 '동양의 도예'에 관해 강의한 것을 비롯하여 '89년까지 남 일리노이대학, 엘로우먼트 공예학교, 피터스벨리 공예학교 객원교수, 하버드대학 연구교수를 역임했다. 또한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에서 '69년 국무총리 상을, '79년 문공부장관상을 수상한 것을 비롯, 다수의 수상경력이 있으며 '76년 미국에서의 첫 개인전을 필두로 지난 '92년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개인전을 가진 바 있다. <고려상감청자 국화무늬 연구> <한국환경도예론을 위한 시고> <세계의 환경도예 연구>를 비롯한 7편의 논문과 <꽃담> <한옥의 건축도예와 무늬> 등을 저술한 바 있는 그는 현재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이화여대에서 도예가 조정현씨를 만난 지 십여 년이 지났지만 예술가로서보다는 그저 동료 교수로 알고 지냈다. 교수들 간의 교제가 한심하게도 빈약하여 변변히 커피점에 가서 마주 앉아본 기억이 잘 나지 않을 정도로 지내왔으니 작가론이나 예술론을 쓰기에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고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조정현은 이화여대 미술대학이 낳은 훌륭한 예술가인 동시에 이론가이며 보기 드물게 빼어난 교수다. 이대 출신이 모교 출신을 크게 평가하지 않으려 하는 자기비하적인 태도를 한편으로는 겸손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좋은 예술가 또는 교수로 대성할 수 있는 인재들을 건성으로 보고 무시해버리는 순간 희생양이 된 사람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이론가로서의 조정현은 미국 유학을 통한 실기수업으로 더욱 다져졌을 것이라 생각된다. 오지그릇이라는 우리 나라의 가장 원시적인 예술에 대한 연구를 누구보다도 먼저 철저하게 연구한 사실 자체도 놀랍지만, 그러한 의식을 가진 사람됨이 경이롭다.
게다가 그가 이미 국내에서 알려진 환경도예 연구가라는 사실도 필자로서는 놀랍기만 하다. 몇 년 전 그가 하버드 대학에 연구교수로 가 있었던 일이 기억나는데, 그때 미국의 환경도예를 연구한 논문은 큰 공헌이 아닐 수 없다.
실기교육면에서도 수 차례에 걸쳐 미국 여러 미술학교에서 우리 나라 고유의 도예기법인 상감기법을 그곳 도예가 들에게 교수한 일도 크게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흔히 미국은 정치 군사적으로만이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한국을 과소평가 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그는 그러한 미국인들을 가르쳤으니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미술대학 교수는 이론보다는 실기, 즉 예술을 가르치는 역할이 가장 크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이론적인 정리작업을 함께 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물며 학생들을 가르치는 예술대학 교수가 이론에 밝아야 함은 두 말 할 나위 없이 명백하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몇 가지 이론 작업들은 중요하다. '86년 '한국 환경도예론을 위한 시고'와 '90년 미국 체류 이후에 쓴 '세계의 환경도예 연구-북미를 중심으로'라는 환경도예 분야에 관한 연구논문이 그렇고, '87년 집필한 '옹기소고' 역시 한국의 오지그릇 제작의 원천을 탐구한 글로서 도예가라면 누구나 읽어야 할 글을 썼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한편 그것들이 모두 훌륭한 연구논문들이지만 그 내용이 너무 역사적인 고찰에 주력하고 있어 현대 미술로서의 환경도예라는 관점에서의 고찰이 조금 미흡했음 또한 푸념해 본다. 사실 도예가 '공예'라는 분야에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인가, 과연 순수예술이나 순수도예조각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인가, 만약 분리가 불가피하다면 환경예술로서의 도예와 조각을 어느 선에서 어떻게 분리하여야 하는가를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짧은 글을 통해 이 문제를 더 깊이 있게 논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겠지만, 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예술성과 실용성 사이에, 공예와 예술 사이에 반드시 선을 그어야 되는가, 또 그을 수 있는가 라는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필연적으로 대두된다.
조정현의 '상감질그릇전('92.4.14∼19, 신세계미술관)'에 출품된 작품들만 보아도 공예라기보다는 질그릇의 재료와 형태를 빌린 실용성이 거의 없는 순수조형물, 순수예술로서의 도예라고 볼 수 있다.
영국의 개념미술가들은 '실용적 물건이 놓이는 장소에 따라 예술품으로 바뀌거나, 반대로 예술품이 실용적 오브제로 어떻게 바뀌는가'를 논의하면서 어떤 도예가가 만든 훌륭한 새(鳥)조각을 예로 제시했었다. 그들은 '크고 아름답게 채색하여 만든 이 도자기를 미술관이나 벽난로 위, 또는 집안의 보기 좋은 곳에 놓았을 때는 예술품으로 간주되지만, 만약 이를 어린이 놀이터에 갖다 놓는다면 어린이 놀이기구로 변할 것이다. 따라서 이 도자기 새는 절대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예술일 수도 없으며 물건(오브제)일 수도 없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이와 같이 도예 분야가 가진 예술장르로서의 딜레마는 다른 어느 예술보다도 크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위에서 말한 영국의 개념미술가들이 생각한 출발점은 프랑스 화가이며 오브제 작가였던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였다. 레디-메이드는 일상적인 오브제가 예술가의 선택에 의하여 예술로 승격된 것임에 반해, 예술이 오브제가 될 수도 있는 문제를 아울러 제기했던 것이다.
굳이 레디-메이드 또는 도자기 조각의 새를 예로 들지 않더라도 한국사회에서도 도자기가 박물관 진열장 속에 안치되면 담을 수 있는 용기로서의 실용성은 거의 제거되고 감상의 대상으로서의 순수예술작품이 된다. 우리 나라 대부분의 박물관에 소장된 품목 중에 회화작품의 수가 현저하게 빈약한 데 반하여 도자기는 그 높은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양도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다른 나라의 미술과 비교해보면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조정현의 최근작에 대한 작품론을 말하기 전에 도자예술의 특성에 대해 언급한 바 있는 영국의 미학자 허버트 리드(Herbert Read, 1893∼1968)와 프랑스의 미술사가이며 미학자인 포시옹(Henri Focillon, 1881∼1943)의 말을 빌어 고찰해보고자 한다.
허버트 리드에 의하면'도자기는 화력의 강약에 따른 우연성에서 비롯되는 표면효과나 색채효과가 나타나므로 절대로 모방이 불가능한, 절묘한 효과가 발생한다. 따라서 도자예술은 예술 중에 가장 뛰어난 상급예술'이라고 말한 바 있다. 물론 그 견고성과 영구보전성도 다른 예술보다 우월하다. 한편 포시옹은 '손의 예찬'이라는 글을 통해 예술가의 손이 지닌 절묘한 기능에 대해 예찬한 바 있다. 손은 때로는 부드러워지고, 때로는 강해지며 또한 형상을 자유자재로 빚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손 그 자체를 '생명의 상급상태'로 보았다.
필자는 그림이나 건축예술이 도구를 사용하는 데 반해, 소조와 도자기는 손가락을 직접 사용하므로 예술가의 의지와 감정이 가장 직접적으로 전달, 표현되는 예술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러한 지고한 우연성이나 절묘한 손의 표현효과가 어떻게 표현되었는가 라는 점이 도예작품의 평가기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아닐 것이다. 이러한 기준은 추상 표현주의 예술의 관점에서 볼 때, 그 재료가 점토이거나 유화물감이거나 간에 직관주의 위에 기초를 둔 예술이라면 자연스럽게 우연과 손의 절묘한 움직임, 그 자체가 예술표현의 수단이 된다. 그리고 때로는 그것들 자체가 예술 그 자체로 간주될 정도로 중시되기도 한다. 아무리 작가의 의도가 강력하게 지배하는 엄격한 반표현주의적 예술일지라도 다소간은 직관과 우연, 그리고 생명력 있는 손의 힘을 입지 않은 예술은 있을 수 없다.
조정현의 질그릇들은 정확성과 부정확성, 엄격한 계산과 우연적인 여유, 미적인 규범과 그렇지 않은 요소들, 다시 말하면 재미는 있지만 그렇게 미적이라고 감탄할 수는 없는 것들을 포용하고 있다 하겠다. 원시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이 공존하며, 정형적인 것과 부정형적인 것이 교묘하게 어울려 있어, 말하자면 양면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현재 화단을 지배하는 주류가 없는 소위 다원주의 시기를 살고 있다. 시대적 상황이 개인의 예술적 감성에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이러한 다원주의적 영향을 오늘의 시대를 살고 있는 예술가들이 공기처럼 호흡하고 산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시대적 조류에 항상 역행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예술가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또 그 어느 것이 절대 옳고 어느 것이 그르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작품은 항상 새로워야 하고 시대적인 감각이 항상 예민하게 살아 있는 작품이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전통을 찾는 것 같지만 현대적인 감각이 이를 감싸고 있는 작품들이 조정현의 최근작들이다. 언뜻 보기에는 신석기시대의 기하학적 무늬 같은 선묘 추상무늬가 부분적으로 작품 표면을 덮고 있다. 유연함과 우연적인 강약이 불연속적으로 표현된 이들 선묘 추상무늬는 때로는 구름처럼 희미하고, 때로는 물결처럼 강하게 흐르고, 때로는 빠르게 질주하고, 때로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듯하다. 그 선묘들이 긁어낸 것만이 아니라 상감기법으로 처리한 점이 그의 새로운 신작에 나타난 새로운 표현이라고 본다. 그런데 그 선들이 생각하고 살아서 하늘을 날거나 안개처럼 빨리 움직여 지나가는 듯하다. 작품 '봄의 찬양(1990)'은 선을 통해서 봄의 경쾌함을 잘 나타내고 있다.
짙은 갈색 바탕에서는 흐릿하게 나타나는 상감 된 청색조 빛깔의 은은함이 조용한 수줍음을 느끼게 하기도 하며 또한 다정하고 수수하게도 보이게 한다. 너무 화려한 색의 대비는 옛스러운 맛에 정면으로 대결하기 때문에 갈등이 생길 수 있는데 그는 아마 그러한 부정적 요소들을 피한 것 같다.
액세서리같이 보이는 작은 모양의 구멍이나 선, 또는 귀를 달 듯이 한 두 군데 붙여 놓은 기하학적인 액센트들이 펑퍼짐하게 긴장이 풀린 것 같은 전체 형태에 긴장감을 주는 역할을 한다. 띠를 두른 것 같은, 굵은 동아리 같은 줄무늬 역시 사람의 의복을 단정히 여민 허리띠처럼 전체를 묶는 힘이 있다. 물론 어떤 것은 보다 회화적인 맛이 있는 쓱 그은 사선 한 두개로 처리한 것도 있다. 굵은 것과 가느다란 것, 간격의 변화 등이 작품의 특성에 따라 제각기 사용되었다. 2층, 3층의 형태가 많지만 때로는 4층, 드물게는 5층까지 쌓아올려 균형을 잡았다. 사물의 형상에 비교하면 탑을 닮았지만 인간형상으로도 비유될 수 있다.
사실, 그의 모든 작품 제목들에는 사람과 사물 또는 추상적인 생각, 시적인 비유 등으로 다채롭게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작품과 제목이 모두 꼭 들어맞는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상당부분은 비유가 들어맞는다고 보아야겠다. 가령 '반달의 기원(1991)'은 3층으로 겹친 세 개의 그릇모양인데, 제일 꼭대기에 올려놓은 작은 둥근 모자형태가 약간 비스듬하게 놓여서 반달모양을 연상시킨다. 사실 이러한 의사 또는 의인적인 ('나와 너의 조화'같은) 제목들보다 '가슴을 열고(1991)' '가슴 부푼 기다림(1990)' '정적의 시간(1992)' 등 추상적인 생각을 나타낸 작품들은 조금 난해한 편이다. 말로는 표현이 안 되는 감각에 호소하는 것이 예술의 본질이므로 제목을 속 시원하게 설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 때로 작품 명은 단지 다른 작품들과 어떤 구별을 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경우도 있다. 추상화가들 중에는 구성 몇 번 또는 작품 제작날짜, 일련 번호로 마치 호텔 방 번호 붙이듯이 처리한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난해성은 입체파 화가인 피카소와 브라크가 원조지만 현대미술이 가진 특성 중에 하나가 되었다.
조정현의 작품은 해학적이며 웃음을 자아내는 즐거움이 있다. 표현주의는 아니지만 전의 표현이 다양하게 시도된 작품들이 있다. 기형에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어떻게 하나 하나에 생각이 담긴 작품을, 그리고 전체적인 우주와 같은 작품 체계 속에서 하나하나 개성 있는 형태의 작품으로 완성시킨 재능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있을까. 조정현은 이론가, 예술가 그리고 교수라는 세 가지 역할을 완수하는 귀중한 존재로서 한국 미술교육과 도자 예술에 공헌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러한 일을 지속해갈 인물임을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