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으로 표현되는 여인의 삶
권병린
황토색 테라코타(Terra cotta)로 재현된 여인상이 관능적이거나 수치스럽기보다는 건강하고 당당해 보인다. 나신상이지만 두툼하고 비대하게 표현된 여인의 모습은 푸근하고 듬직한 '어머니', 혹은 만물을 생산해내는 '대지'를 떠올리게 한다. 테라코타로 여인을 조각하는 여성 조각가 한애규(47세)씨의 작품은 삶의 주체로서의 여인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제 작품에서 어머니 또는 아내의 모습을 느낀다고 해요. 그러나 그 외에도 인간으로서 느끼는 삶을 포함하는 여성의 삶을 표현하고 싶어요"
도자기를 구워오던 한씨가 테라코타로 바꾼 것은 80년대 말부터이다. 복잡한 시내를 벗어나 한적한 교외에 자리잡고 있는 그녀의 작업실은 작업실이라기 보다는 일반 가정집같은 차분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그녀가 작업하는 지하 작업실에는 여기저기 흙과 도구들이 흩어져 있고 오래된 팝송이 조용히 들린다. 한켠에서 백열등 전구 아래 작업하는 한씨의 모 습은 바로 작품에서 보여지는 그 모습이다.
"작가와 작품은 오래될수록 닮아간다고 해요. 제 작품에서도 제 모습이 나타난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요"
한씨의 작품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그때그때 느낀 단상들을 그림일기를 그리 듯, 일기를 쓰듯 그려나간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녀의 여성에 관한 생각들을 부풀리고 각색하여 만든 것이다. 그녀가 여성에 관해 관심을 갖는 것은 바로 그녀 자신에 관한 관심이라고 한다. "현실의 제 상황에 대한 '왜'라는 질문에서 시작돼요. 모든 제도와 관습과 인습, 구조가 생겨나고 전개되어 가는 과정을 집요하게 추적하여 보기도 하고 국가나 사회윤리와 도덕 권위 등 남녀에 대한 사회적 인식 이전의 우리를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그녀는 또한 꾸미고 포장하기 보다 지극히 평범한 것을 좋아한다. 좋은 작품이란 무엇보다도 '제대로 살아가는 일'에서 나온다는 그녀는 '내 생활의 더도 덜도 아닌 것' 그리고 '무엇 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사느냐는 것이고 삶은 그 어떤 것보다도 앞서는 것' 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줄곧 여인만을 고집해왔는데 최근 들어 그녀의 작품속에서 남자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지난해말 가진 6번째 개인전에서 "어떤 순간"을 주제로 한 20여 점의 작품들은 여인형상을 주로 하면서도 사람과 사람의 관계 또는 조화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었다. 남자가 함께 작품에 등장하며 그것도 서로 격렬하게 포옹하고 있는 애로틱한 분위기까지 풍기고 있다. 그러나 그 역시 말초 감각을 자극하는 애정 표현이 아니라 건강한 남녀가 서로를 절실히 원하고 아끼는 진실된 포즈들이다.
이 전시회의 달라진 작품 경향에 대해 한씨는 "그동안 희로애락 중 분노의 감정을 표현했 다면 이번 주제는 오래 전부터 꼭 한번 다뤄보고 싶었던 '사랑'의 문제" 라고 말했다. 또한 페미니즘 문제에 대해서도 "이번 작품에 나오는 여성들은 수동적으로 앉아서 남성의 사랑 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사랑을 찾아가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유난히도 책을 좋아해 작업시간 외에는 대부분 책을 본다는 한씨는 책을 보면서 작업구상을 한다. 그래서 그녀는 많은 글을 노트에 기록하는데 그 중의 한 구절. '내 안에는 무수한 욕망이 마치 구근(救根)처럼 자리잡고 있어 때를 만나면 솟아오르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 심장은 뛰고 싶어하고 근육은 긴장하고 싶어하며 눈은 빛을 발하고 싶어한다. 그것들을 이제 생명력이라 부르고 싶다.' 88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개최된 트리에날레 국제 전시회 도자 조각과 91년 한국 현대도예 유럽 순회전에 참가한 한애규씨는 현지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것은 작가로서의 성실성과 자기성찰성 그리고 현실을 보고 이해하는 인식의 힘이 그런 결과를 가져온 것으로 풀이 된다.
금호갤러리의 큐레이터이자 미술평론가인 박영택씨는 한씨에 대해 "인간이 인간이기 때문에, 여성이 여성이기 때문에 행복할 수 없는 어떤 상황이 존재하고 있다면 이 문제와 맞서 서 끝까지 추적하려는 자세가 작가로서의 성실성일 것이다. 그런 의지 한편으로는 이 작가 의 작업 전편에 걸친 회의와 비극성의 축축한 냄새가 짙게 풍겨지지만 그런 정조 이외에 특유의 건강성과 능동성, 자기성찰성 그리고 현실을 보고 이해하는 인식의 힘, 낙관성 또한 여 전히 굳건하게 자리잡고 있다. 아마도 그 둘은 항시 상보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동일하게 등장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쨌든 그 점이 한애규만의 강인함이고 의연함이며 정숙함이다.
그래서 그의 작업을 볼 때마다 노동과 수고, 위안과 의지, 사유와 성찰, 시간의 경과 에 따라 축적된 단단한 삶을 보는 시선이 기분좋게 드리워져 있음과 마주한다"고 말하고 있다.
삶의 주체로서의 여성의 삶을 테라코타를 통해 표현하는 한애규씨. 앞으로도 그녀는 자신의 삶의 명제로서 한 사람의 여인의 삶을 표현하겠다고 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