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문 - '흙'으로의 회귀의식을 주관하는 사제
윤진섭 (미술평론가)
김용문의 행위작업에 있어 가장 두드러지는 요소는 시간성과 우연성이다. 이는 기왕에 펼쳐보인 바 있는 그의 「(埋葬), 그리고 (發掘)」展, 「수장祭」,「放死, 放邪, 放生展」展, 그리고 최근의 「애葬」展 등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현상이다.
1983년 지리산 枯死木地帶에서 가진 「埋葬 , 그리고 發掘」展에서 그는 작가자신의 분신이랄 수 있는 수많은 데드마스크를 전시한 뒤, 이들을 땅속에 매장함으로써 기록적인 의미의 작업을 선보인 바 있다. 여기서 보이는 데드마스크의 매장은 이듬해 단양읍 하방리 남한강변에서 펼친 「수장祭」에서 土偶를 강물 속에 던지는 행위와 상당히 유사한 연계성을 지니고 있음이 감지된다. 이처럼 토우를 땅에 묻거나, 강물 속에 빠뜨리거나, 항아리에 실려 바다로 떠내려보내는 일련의 행위들은 필경 언젠가는 누군가의 손에 의해 발굴되거나, 건져지리라는 가정을 미리 상정하고 있다. 따라서 土偶를 매장하거나 강물에 던지는 행위는 의도적이되, 어느 시기에 이를 발굴해 내는 자는 전혀 예기치 않은 우연한 만남인 것이다.
상전벽해라는 말도 있거니와 시간이 흘러 자연이 가져다줄 지형의 변화는 강을 능히 논밭이나 주거지로 만들 가능성이 짙고, 그 때 밭을 일구는 어느 농부의 곡괭이에 걸려 토우 몇 개쯤 출토되리라는 사실을 어렵잖게 상상해 볼 수도 있다. 이처럼 작가의 의도와 발굴자의 우연한 미적체험 사이에는 '그 어느 땐가'라는 미래지향적인 조건붙임이 정립된다.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작가는 「空間」에 기고한 작가발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제 나의 분신들을 埋葬하려한다. 그것은 어느 시기에 발굴될 때 他경험으로 새로운 의미의 가치를 가지게 된다. 「埋葬함으로써」수동적이라고 생각되는 자연에 회귀하는 한편 모든 것을 철저히 파괴시켜 한 자연의 일부분이 되어버린다."
김용문의 자신의 행위작업을 펼칠 장소를 물색하는데 있어서도 의도적임을 엿볼 수 있다.
도처에 널린 山河중에서도 그는 유독 사연이 서린 곳을 즐겨 선택한다. 하얗게 비틀진 나무들의 잔해가 을씨년스럽게 서있는 지리산 枯山木地帶 라든지, 충주댐의 건설로 인하여 정든 땅을 등져야 하는 수몰민의 恨이 서린 단양의 남한강, 공비의 출몰로 숱한 인명이 목숨을 빼앗긴 제주의 이호동 골왓마을 등 한결같이 '죽음'이나 '恨'의 이미지와 결부된 곳들이다.
왜 그가 이러한 장소를 굳이 선택해야 하는가 하는 이유는 그가 채택하고 있는 토우라는 구체적인 예술형식을 살펴봄으로써 밝혀질 수 있다.
1982년 1월 「대성리 35인전」에서 토우작품을 처음 선보인 이래 뉴코아미술관에서의 개인전과 85년 한강미술관에서의 개인전 및 수 차례의 단체전을 통해 나타난 土偶의 양상은 끊임없는 형식실험을 거듭해 나가는 가운데 점차 단순화의 과정을 보이고 있다. 초기의 작품에서 보이는 선명한 이목구비의 두상묘사가 사라지는 대신 脂體가 덧붙여지며 표정은 상징적으로 간략히 처리된다. 사지는 흡사 문둥병자의 그것처럼 녹아 뒤틀려있으며 이지러지고 찌그러진 얼굴의 표정은 때로는 우는 듯, 때로는 웃는 듯, 형용키 어려운 모습을 띄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대충 뭉뚱그려놓은 팔다리와 옷을 걸치지 않은 맨몸, 그 위에 얹혀진 납작하게 짓눌린 민머리의 얼굴에 담긴 갖가지의 표정들이 빚어내는 집단적 분위기는 다름아닌 이 땅에서 살다간 우리 선조의 모습이요, 이 시대의 민중들의 삶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보는 자로 하여금 감동케 한다. 흙에서 태어난 인간이 흙으로 귀일하듯이, 이제 김용문은 흙으로 빚어 만든 토우에 굽이굽이 서려있는 이 땅의 민중의 온갖 맺힌 恨을 문신을 새기듯 새겨넣고 다시 흙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엄숙한 儀式을 집전하는 사제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김용문은 自作詩 가운데서 이러한 심정을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저 언덕 이 물에는 재울 恨도 많이 있고
우리 삶의 치욕마다 깨울 魂도 많이 있네
재울 한 깨울 혼, 이 손으로 모두 모여
혼 깨워서 한 재우고 한 재워서 혼 깨우면
빗재에 앉은 이 몸이 눈물에 풀려 뜨겠네
둘러보면 이 땅에는 잠재워야 할 한도 많이 있고,
불러내야 할 혼도 많이 있습니다.
흙을 빚어 토우를 만드는 뜻은 한을 풀어내고자 함이요.
나무를 깎아 장승을 세우는 것은 혼을 불러 깨우는 뜻입니다.
('빗재에 걸터앉아 장승을 깎자 하니' 중에서 일절)
김용문 토우 작업의 요체는 이처럼 삶이나 죽음 그 자체를 노래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익살맞은 토우의 形姿나 표정을 빌어 현상을 초월하여 승화시킬 줄 아는 작가적 천품(天稟)에 있다. 삶을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할 때 그 삶은 지나친 感傷이거나 적절히 미화된 것이기 십상이고, 죽음은 슬픈 것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진부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상투적이다.이러한 논리에서 탁월한 예술가는 웃음을 통하여 관조자로 하여금 비애와 맞닥뜨리게 할 줄 아는 능력을 지닌 자이다. 김용문의 토우세계는 집단적 삶의 현장의 한 縮圖이다. 그 속에는 생·노·병·사·희·애·락의 온갖 애환이 담겨 있다. 그의 행위작업에서 현장성이 강조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 있다. 현장을 떠나서 삶의 리얼리티는 획득되지 못한다. 그가 집요하게 관심을 보이고 있는 우리의 기층문화, 그 중에서도 특히 巫俗은 집단신명을 통하여 공동체 의식을 다지는 효능을 지니고 있다. 그가 자신의 작업에 굿거리를 곧잘 등장시키는 연유도 이것을 매개로 하여 이러한 집단신명을 통해 진작된 참여자간의 공동체 의식과 이의 상징체계로서의 土偶群像의 긴밀한 정신적 유대를 기하고자 함에 있다.
김용문은 최근에 '굿 미술'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는 서구의 퍼포먼스와 대응적 위치에 설 수 있는 우리 고유의 행위예술형식으로 굿을 꼽는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우리에게 지속되어 온 고유예술관념이 있는가? 만약 있다면 면면히 이어 온 '굿거리'이다. 현장 속에서 자연성과 더불어 생존하고 현장속의 놀이에서 구체화되는 행위체로서의 '굿거리'이다…… '짓거리'가 굿이다. 여기에서 '굿거리'는 행위자체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설치되어있는 작품과 항상 정신의 상호작용에 기인한다. 이것을 나는 '굿미술(예술)'이라 칭한다" - (아르꼬스모 미술관 기획 서울 '86행위·설치미술제 카다로그 작가의 발언 중에서) -
위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김용문은 굿의 형식과 미술의 형식을 결합시킴으로써 독자적인 예술형식의 구현을 꾀하고 있다. 실제로 그는 「수장祭」를 비롯해서 수 차례의 행위작업에서 굿의 형식을 빌은 바 있다. 그러나 여기서 지적될 수 있는 그의 오류는 문화의 한 형식인 '굿거리'를 어떠한 예술적 여과과정도 거치지 않은 채 그대로 예술의 문맥에 이입시킴으로써 이를 예술과 대등한 위치에서 파악코자 하는데 있다. 주지하다시피 굿 그 자체는 예술이 아니다. 왜냐하면 굿은 창조적 주체로서의 예술가의 숨결이 불어넣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김용문 행위 작업에서 '굿거리'가 단지 배경의 차원에 머물고 있는 이유도 이러한 연유에 기인한다. 그러나 그의 행위 작업에 있어 굿의 등장은 저항감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데, 그 까닭은 그가 채택하고 있는 장소가 지니는 현장감과 함께 토우의 형상이 '굿거리'가 발산하는 분위기와 함께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예술가가 독자적으로 설정한 예술형식을 고집할 때 기실 그는 보다 많은 것을 잃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술은 경직된 관념이나 형식의 결합일 수 없으며 섣부른 논리의 주장이어서는 더욱 곤란하다.
예술가가 머리를 위해서가 아닌 「영혼의 울림」을 위한 정진을 계속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음은 물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