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輪廻)' 연작에 나타난 '묵(默)'의 세계(世界), 그리고 그 흔적(痕迹)들
이재언 (미술평론가)
오늘의 미술에 있어 도예는 과연 무엇인가? 도예는 오늘의 미술사 속에서 미술로서의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는 장르인가, 아니면 미술과는 별개 혹은 상호보완 관계 정도로만 족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인가? 이 물음이 우문(愚問)임에는 틀림없으나, 도예계에서나 미술계에서 보다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 되는 중요한 화두(話頭)일 것 같다. 이제 현대도예는 치열한 실험과 모색, 도전이 이미 일단락 되고 정착과 성숙을 향해 가고 있는 시점이다. 그러나 그 방향이 과연 어느 쪽을 향해서 가고 있는지를 진지하게 검토해야할 시점인 것이다.
도예가 통상 공예의 하위 개념으로 규정되곤 한다. 적어도 공예라는 개념이 모든 미술, 모든 사업을 일컬었던 시대엔 별 무리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서 나타난 급격한 토양 및 환경의 변화는 개념적 변질을 필연적으로 강요했다. 도예는 이제 본질적으로나 현상적으로, 그리고 개념적으로도 전과 다른 접근과 결단을 요구하고 있다. 비록 도예가 수많은 표현의 양식과 이념들이 명멸하고 있는 것에 대해 순발력 있게 대처하는 편은 못될지 모르지만, 진지하고 밀도가 높으며 심오한 조형세계를 일구하는 영역이라는 점에 대한 미술계의 솔직한 인정과 도예계의 자신감 있는 참여가 요구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진지하게 성찰해야할 화두의 해답을 우리는 도예가 한길홍에게서 시사 받을 수 있다. 지금까지 흙을 통해 그가 추구해 온 조형은 그간 몇 가지 주제와 양식의 추이(推移)속에서 흙을 통해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극대화시키고 있다. 그 결과는 흙을 통한 조형이 도예 고유의 밀도와 심오함을 유지하는 가운데 동시대의 미학적 과제에 활발하게 동참하여 도자 조형의 우성(優性)유전자를 확인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그 동안 <'질꼴' 스쿨>이라 할 수 있는 집단적 개성 연출자로서의 역할, <서울국제도예비엔날레>에서의 리더쉽, <한국미협> 수뇌진에서의 활약 등도 나름대로 도예의 새로운 위상 전략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할 수 있다.
소위 도조적 성향을 통해 오늘의 조형예술 과제에 참여한 것은 80년대 초부터이다. 그동안 '생(生)', '합(合)', '윤회(輪廻)' 연작들을 통해 드러난 그의 조형적 성격은 몇 번의 주제 변환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선이 굵고 일관되게 드러나고 있다. 본격적인 도자 조형에 나서기 전의 器(기) 작업에서도 이미 나타난 바 있지만, 그의 작업은 과묵하고 단순한 구조, 흙 자체의 물성적 자율성을 부각시키는 절제와 관조적 사유를 바탕으로 한다. 특히 최근 선보이고 있는 "윤회" 연작에서 이런 점이 잘 드러나고 있다. '생' 연작에서는 단순 구조와 형태 속에서 생기발랄한 도자 조형의 다양한 관계항들이 단순성 속에 밀도 있고 이지적인 사유를 농축시키고 있다.
한편 최근의 '윤회 시리즈'에서는 전보다 더욱 절제된 구조 속에서 흙 고유의 정서와 언어를 보다 세련되고 심오하게 표출시키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이 연작에서는 작가도 술회하고 있는 바와 같이 자신의 자유로운 사유와 의식들이 중요한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제 존재의 세계를 보다 관조적으로 사유하기 시작하면서 '합'에서 보인 의지적 결합의 양식을 극복하고 보다 자연적 질서와 생명의 질서를 희구하는 변화를 드러낸다. 그리하여 대립적이고 이질적인 요소들이 어디엔가 숨어 있는 질서 속에서 순환하고 소통하고 있음을 은유적으로 시사하는 '윤회' 연작으로 나타난 것이다. 물론 어떤 점에서는 '합'과 '윤회' 연작이 기법과 모티브 면에서는 동일선상에 있기도 하다. 그러나 사유를 통한 내재적 질서의 관조라는 측면은 양자간에 일정한 거리를 느끼게 하고 있다.
최근 보다 깊고 유현(幽玄)한 흙의 내재율을 터득해낸 라쿠 작업은 그가 역점을 두는 원시적 생명력을 절묘하게 조율하고 있다. 예기치 않은 우연적 효과(실은 이것조차도 치밀하게 계산된 것이 아닌가) 하며 그 프로세스에서 오는 유희, 환상, 희열의 경험들이 그에게는 필요충분 조건일 것이다. 어딘지 모르게 비어 있는 그의 구조는 수묵보다 더 깊은 묵(默)의 질서와 선(禪)의 경지를 담아냄으로써 고품격의 상징과 신비적 환상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시간, 그 처음도 끝도 알 수 없는 영겁(永劫)의 시간들을 시사하는 흔적들도 예사롭지는 않다. 반복적 구조에 반복적으로 드로잉 된 흔적들은 절단과 재결합이라는 모순과 변증의 담론을 담고 있다. 기하학적으로 절단된 면들이 다시 재결합되면서 자아내는 변주(變奏), 즉 미세한 오차와 왜곡이 절단과 재결합을 통해 나타나는 긴장과 화합의 변주는 흙만이 줄 수 있는 마술과도 같은 희열을 줄 것이다.
유현하고 신비적인 默(묵)의 세계와 함께 마주하는 이 흔적들은 그가 펼치는 사색이 얼마나 자유로운 무중력의 세계, 무한대의 세계로 비상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번 근작에서는 묵유(墨釉)와 라쿠와 연(煙) 효과가 병행되어 그의 작업이 주는 호소력은 아득한 심연까지 울리고도 남는다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