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문 정(홍익대학교 도예연구소 연구원)

 

몇 해전 아내와 두 아이들을 데리고 안동지역을 여행한 일이 있었다. 마당 한 쪽에 놓인 절구통, 작은 외양간에 놓인 소 여물통, 부엌 선반에 놓인 낡은 바가지와 길이 잘 든 함지박, 시간의 흐름 속에 세월의 흔적이 녹아 내린 자연의 질감들... 이 모두가 꾸밈없는 자연이 만들어 낸 어린 시절, 늘 곁에서 함께 한 아름다운 옛것에 대한 기억들이었다.
나의 작업이 '자연의 미'를 표현하는데 있어서 그 어떤 질서나 원칙에 구속받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꾸밈없는 자연이 정겹고 편안했듯이 흙으로 이뤄진 나의 작업 역시 낯설음 없이 편안해서 즐거운 미소를 머금을 수 있었으면 한다. 그래서 꾸밈과 쓰임이 함께 하는 늘 넉넉한 손의 흔적으로 남았으면 한다.
2002. 10 최남길 (전시 도록 서문 中)

그의 작품은 편안하다. 구상적인 형태와 차분한 색감, 그리고 익숙한 소재를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작가가 작품을 계획하는 단계에서 이미 고려한 것이다. 최남길은 작가란 작품을 통해 관람자와 의사소통이 가능하며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것을 '관람자에 대한 배려' 혹은 '작가의 여유'라고 그는 덧붙여 설명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입장은 작품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작가가 작품의 의사소통 코드로 선택한 것은 바로 전통적인 한국의 미, 자연의 아름다움이다. 전통적인 소재를 채택하는 작가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 가운데서 최남길의 표현 방법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표현된 대상의 조형적 가치에 우선하는 의사소통의 매개물로서의 가치이다. 그렇다고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조형적 아름다움과 완결성이 떨어진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는 견고한 완성을 통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있다.

작가는 강원도 고성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에게 있어 자연적인 것, 토속적인 것은 생활 그 자체였다. 그는 가장 익숙한 것, 편안한 것을 자신의 작품에 끌어들였고, 성공적인 결과물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얻은 결과였다. 세 번의 개인전을 열기까지 10여년간 그는 자신의 작업 스타일을 찾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엄청난 양의 작업을 하였고, 규모가 큰 작품을 통해 제작 기술의 노하우를 쌓았다. 작가가 회고하기를 그 시절은 유행을 쫓아 자신의 것을 제대로 찾지 못했던 때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창작자가 피할 수 없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과도기라고 사료된다. 그 시기에 얻은 작업 기술과 수많은 고민이 오늘날 최남길의 조형세계를 가능하게 해준 밑거름이 되었다.
그는 규모가 큰 추상적인 인체형상의 조형작품에서 탈피하여 3회 개인전에 이르러 전통적인 소재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고, 4회 개인전부터 일관된 그의 작업스타일을 찾게된다. 그는 토속적인 소재를 매우 안정감 있는 대칭형의 구도로 표현한다. 절구통, 소 여물통, 나막신과 같은 형태들이 꾸준히 반복되어 나타나고 그 위에 여러 가지 장식적 효과를 이용하여 변화를 주었다. 여기서 작가는 오랜 시간 축적된 제작 기술과 흙에 대한 자신감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유약과 석고틀을 이용하여 나무결과 돌, 브론즈 등을 점토로 실감나게 복제하거나, 금속과 같이 점토와 물성이 다른 오브제들을 도자 작품에 조합하였다. 이처럼 두 가지 방법으로 제작된 결과물은 쉽게 그 차이를 구별하기 어렵다. 또한 제작과정이 까다로운 용기들은 그 마무리가 완벽하여, 단아하고 고요하게 그의 뛰어난 작업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작품의 견고한 완성을 통해 '꾸밈'과 '쓰임'의 조화를 꾀하려고 한다. 이는 상징적이고 상대적인 개념으로 사용되는데, 기본 형태 위에 오브제들을 결합하여 새로운 의미 형식을 시도한다. 오브제는 그 크기에 상관없이 기본 형태의 부속품이 아닌 동등한 대조 가치-실용(用)에 대응하는 장식(美)의 개념-의 역할을 하고 있다.
4회 개인전부터 모든 작품의 제목은 '古'이다. 이를 통해 그의 일관된 창작 작업에 대한 의지를 알 수 있다. 또한 여기서 관객에 대한 배려를 읽을 수 있는데, 제목 '古'에 붙여진 다양한 부제(副題)들이 바로 그것이다. 작가는 부제를 통해 때로는 즉흥적으로, 때로는 서정적으로 관객들과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그것은 작가와 나누는 가벼운 대화와도 같아서 관객은 더욱 편안한 마음으로 작품을 대할 수 있다.
관객이 없는 작품은 최남길에게 무의미하다. 그는 관객과 소통하기 위한 방법으로 작품을 제작한다. 작가는 토속적인 한국의 아름다움을 관객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공통소재로 파악하고, 그것을 가장 충실한 방법으로 재현해낸다. 작가가 의도한 대로 관객은 눈에 익숙한 형태의 작품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작품에 담겨진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 결국 작품을 매개로 작가와 관객들이 대화를 나누며, 어울려 함께 바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최남길의 작업 계획은 공예라는 개념에 더욱 접근하는 것이다. 공예는 작품을 감상할 뿐만 아니라 항상 곁에 두고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 관객들과 거리가 가까운 예술이다. 이러한 그의 계획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그것은 작가의 관객에 대한 고려가 작품 형성의 적극적인 요소가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작가의 작품 스타일이 새로운 방향으로 전향되기에 이른다는 것이다.
사실 작가는 성실하기로 정평이 나있는 사람이다. 그는 교육자로서, 작가로서, 그리고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항상 최선을 다한다. 필자가 작가와 인터뷰를 하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바로 그의 겸손함이었다. 아직도 더 노력해야 할 부분이 많다고 자신의 작품을 평가하는 작가를 통해 그의 작품의 꾸준한 발전과 새로운 세계로의 진출을 가늠해 본다.

 

 

「古」-풍요-2002(Ⅱ) 53×23×23cm	「古」-자연예찬-풍요로운 땅 45×25×56cm
「古」-자연회상(Ⅰ) 62×21×24cm	「古」-자연일상(Ⅰ) 51×28×50cm
「古」-길일-좋은날(Ⅱ) 45×25×56cm	「古」-자연회상(Ⅲ) 43×39×52cm
「古」-곡우-풍요로운 비 70×22×32cm	「古」-자연회상(Ⅳ) 58×32×29cm
「古」-침묵의 소리-기억의 音 63×29×33cm	「古」-대지에서…(Ⅰ) 35×32×56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