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의 경험을 표출해내는 기(器)
-루디 오티오(Rudy Autio)
- 김선정
Ⅰ. 서론 오래 전부터 기(器)를 바탕으로 작업을 해온 작가들이 많았다. 물론 용기(容器)로서 실생활에 가깝게 쓰이는 그릇을 만드는 작가들도 있고, 1970년~1980년대에는 용기의 장식에 있어서 인간의 형상이나 풍경의 이미지를 다채로운 색으로 표현한 작가들도 있다. 현대에 와서 기(器)로 출발하지만 결과적으로 다른 의미로 표현되어지는 작품을 다루는 작가들을 살펴봄으로써 그들의 관점을 알아보고자 한다. 그 가운데 오늘날 기(器)의 형태의 작업을 꾸준히 해오고 있는 루디 오티오(도판 1)를 연구해 보고자 한다. 첫째로는 그가 오랫동안 한가지를 꾸준히 작업해 온 이유가 어떠한 것인지, 그의 생애를 통해서 알아보고자 하며, 두 번째로는 그 형태와 내용을 도판과 함께 살펴봄으로써 기(器)로 출발한 다른 작가들과는 어떻게 다른지 함께 토론해 보고자 한다.
Ⅱ.본론 1. 루디 오티오의 생애 및 시대적 배경 1926년 10월 8일, Montana Butte에서 태어났다. 이 뷰트라는 도시는 매우 흥미롭고 바쁜, 부산하게 움직이는 곳 이였다. 1920~1930년대의 뷰트는 기후와 삶이 꽤 현저한 큰 도시였으며, 많은 사람들로 가득한 광업 야영지였다. 1900년대에 이탈리아인, 유고슬라비아인, 핀란드인, 유태인, 콘월인 등, 여러 소수 민족들의 사람들이 이민을 해왔고 그들이 자연스럽게 정착하였다. 그들은 자신의 작은 식민지에서 유지되었던 문화적인 독자성을 이 뷰트에 모았다. 뷰트는 광산지 역임에도 불구하고 음악, 미술, 스포츠 등 다양한 문화가 혼합되어져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미국인, 어머니는 핀란드인 이셨다. 아버지의 직업은 광부였으며, 어머니의 직업은 하숙집 직원으로 요리사와 웨이터였으며, 그들은 뷰트에서 만나 약 1917년에 결혼을 하셨다. 루디 오티오에게는 한 명의 여동생과 두 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한 명은 어릴 때 죽었으며, 형은 핀란드에서 태어났고 여동생과 오티오는 이 곳에서 태어났다. 루디 오티오는 어린 시절 Finnish community―이민해온 핀란드인 이 함께 모여 사는 공동체 지역―에서 핀란드 친구들과 핀란드 어를 사용하며 자랐다. 좋게는 광산이 뷰트의 주된 경제 활동을 제공해주어 수 천명의 다양한 인종들이 일을 할 수 있지만, 나쁘게는 위험한 작업 환경 때문에 끔찍한 사건들이 끊이지 않았다. 2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죽게된 큰 사건들임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신문에선 보통 뒤 페이지에 파묻혔으며, 사람들 또한 특별한 자연 재해 쯤으로 생각하곤 하였다. 이러한 상황들을 볼 때 광산에서의 종교(교회)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또한 그 곳에는 매우 강한 카톨릭 커뮤니티(community)가 있었다. 한편에 아일랜드 사람과 또 다른 한편에는 핀란드 사람이 살고 있었으며 모두는 매우 우호적인 관계로 지냈다. 루디 오티오의 가족들도 교회 활동을 하였으며, 그도 그러했다. 오티오의 가족들이 다니던 교회는 핀란드의 루터 교회였으며, 오티오는 그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조각, 그림들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티오 자신에게 있어서 초등 학교와 고등 학교가 매우 중요했다고 느꼈다. 뷰트에는 매우 우수한 공립 학교가 있었다. 초등 학교에는 시와 드라마에 애정을 가지고 있고, 예술에 매우 호의 적인 훌륭한 아일랜드 학교 교사가 있었다. Sullivan와 Mulholland, 그리고 O'Brien이었는데, 그들은 학생들을 다루는 능력이 뛰어났다. 초등 학교 안에 W.P.A (Works Progress Administration)라는 예술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지금 현대의 교육보다 시나 미술 등의 예술 방면에서 상당한 수준을 가졌었다. 그들은 불황기에 나라에서 얼마간 지원을 해주는 예술가들이었다. 1935년 오티오가 9살이었을 때, 그들이 학교에 와서 미술 전시를 하곤 했다. 또 그들은 야간 학급을 가르쳤으며, 오티오는 그 일을 도왔다. 그 때 오티오가 그림 그리는 것을 배웠다. 오티오는 그들이 실크스크린(silkscreen)을 인쇄하는 것을 보곤 하였는데 그들은 매우 숙련된 예술가들이었다. 오티오는 9살 때 처음 드로잉 전시를 가졌을 만큼 드로잉에 있어서 꽤 대단한 명인이었다. 자신이 말하길, 잡지를 카피 할 수 있을 정도였고, 명암도 훌륭하게 넣을 수 있어서 선생님들이 오티오를 인상깊게 보았다고 한다. 뷰트에서 이렇게 초등 학교를 나온 후, 고등 학교에 다니며, Parson's School of Design에서 공부한 Carolyn Busch Jacobs와 파리에서 공부한 Olga Ross Hannon라는 여자 선생님이 그림과 공예 등 많은 것을 가르쳤다. 그 밖의 다른 선생님들도 있었는데 그는 Chicago Art Institute에서 공부하였고 애시캔 파(Ashcan group:20세기 초에 도시 생활을 그린 미국의 생활 풍경 화가들)의 한사람 이였다. 주로 초상화와 인물화를 배웠으며, 많은 시간동안 그림을 그렸으므로 초상화를 매우 잘 그렸다. 고전적인 양식의 포스터도 할 수 있었다. 자료에 조사된 바가 없어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고등학교 당시 해군에 합병되었다가 중간에 휴가를 받아 1944년에 고등 학교를 졸업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1944년에 고등학교 졸업 후, 다시 군대로 들어갔고 그 당시는 전쟁이 거의 끝나는 시기였다. Farragut에서 신병훈련을 받았고, 다시 오클라마(Oklahoma)에 가서 비행기 정비사로 양성되었다. 그 후, 네바다의 갤런(Galon, Nevada)에서 약 2년을 보내었다. 오티오의 해군훈련은 바다에 가기 위해 자발적으로 지원을 했었다고 한다. 전쟁이 거의 끝나가는 시기였으므로 전쟁에 참여는 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몬타나에 가서 건축학 공부를 하였고 예전의 고등 학교 미술 선생님이었던 Carolyn Jacobs를 만나서 그의 충고로 미술로 전공을 바꾸게 되었다. 그리고, 몬타나에서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훌륭한 예술 학생인 에술 클럽의 회장이었던 지금의 아내 Lera를 만났다. 서로 호감을 가지고 가깝게 지냈으며, 또한 그 곳에서 피터 볼커스(Pete Voulkos)를 만나게 되었다. 지금까지도 좋은 친구로 남아있다. 몬타나 주립대에 프란세스 센스카(Frances Senska)라는 선생님이 있었는데, WAVES(Women Accepted for Volunteer Emergency Service: 해군의 여군 예비 부대) 출신으로 Grinnell College에서 공부했고, 또한 가정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크렌부룩(Cranbrook)에서 유명한 핀란드 도공, Maija Grotell과 공부했다. 그 후에 센스카는 몬타나 주립대에 도자기 과를 설립했다. 그것은 필수 과정이었다. 오티오와 다른 학생들은 센스카의 작업장 짓는 것을 도왔다. 물레, 가마를 만들고 보즈맨 근처에서 점토를 팠다. 피터 볼커스도 역시 함께 작업했다. 볼커스는 원래 화가였지만, 도자기에 반해서 많은 작업을 하였고 또한 매우 잘했다. 8인치가 넘는 큰 항아리를 완벽하게 물레로 찼다. 그 후에, 그는 모든 그의 시간을 도자기 부문에 쏟았으며, 볼커스의 뛰어난 실력 때문에 모두가 그의 주변에서 그의 작업을 지켜 보았다. 학생으로 나라의 도처의 상을 획득하기 시작하였던 그는 여전히 그림에 흥미가 있었지만 도자기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오티오는 센스카 밑에서 공예와 석판인쇄, 도자기와 디자인을 배웠는데, 그 자신 스스로 그 당시 물레 실력이 뛰어나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몬타나는 외부의 예술세계에서 매우 고립되어져 있었다. 모든 정보는 잡지를 통하는 길밖에 없었으며, 어떠한 전시회나 세미나, 박물관뿐만 아니라 그와 비슷한 것조차도 없었다. 그래도 몬타나 주립대학에서 훌륭한 선생님들과 만남이 외부와 약간이나마 접할 수 있는 기회였다. 얼마 지나 밥 드 위즈(Bob De Weese)라는 당시 최고의 화가가 왔다. 밥과 다른 여러 선생님들을 통해 큐비즘의 영향을 받을 수 있었고 슬라이드를 통해 미술사와 현대 미술을 배웠다. 그러나 실재의 것을 볼 기회는 없었다. 1950년 몬타나 주립대를 졸업하고 풀만(Pullman)의 워싱턴 주립대학(Washington State Universty)에 T.A. 제안을 받아 그 곳으로 갔다. 볼커스는 미술과 공예를 공부했다. 그 곳에서 목각, 주물, 석고 캐스팅 등 먼저 조각을 했다. 그 후, 벽돌을 생산하던 아치브래이(Archie Bray Foundation, in Helena, Montana)에서 오티오와 볼커스가 만났다. 그 곳에서 흙을 다룰 수 있는 도예가가 필요했기에 피터 볼커스와 함께 작업장과 가마 등을 지으며 도자기 관련된 일을 하였다. 1951년과 1952년 사이에 Puyallup Fair(Western Washington State Fair)에서 좋은 전시가 있었다. 그 곳에서 곤잘레스(Boyer Gonzales) 그림을 보고 감탄하였다. 오티오는 조각을 했었지만 회화를 많이 접하였고 어렸을 때부터의 그림 훈련 때문인지, 그림을 관심있게 보고 또 수채화를 많이 그렸다. 주로 추상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인물, 동물, 풍경등을 다루었다. 워싱턴 주립대에서 약 2년 가량 보낸 후, 볼커스와 함께 다시 아치브래이로 돌아와 대학원 생활을 했다. 원래 아치브래이는 오래 전에 벽돌을 생산하던 26에이커 면적의 공장(Western Clay Manufacturing Company)이었다. 그러나 브레이씨의 예술에 대한 관심과 후원이 시작되어, 1951년 봄, 그는 도예를 위한 스튜디오와 아트센터를 설립하였다. 그의 꿈은 ‘모든 이에게 개방된 작품에 전념할 수 있는 좋은 작업장소 제공’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바탕아래 아치브래이의 기초가 다져졌고, 피터 멀로이(Peter Meloy), 브랜슨 스티븐슨(Branson Stevenson), 그리고 아치(Archie)가 지위하였다. 스티븐슨은 은퇴한 예술가였으나 그의 직업은 실업가였다. 그는 종종 판화와 도예를 하곤 하였다. 피터 멀로이는 법률가였으며, 그의 형제 행크 멀로이(Hank Meloy)와 함께 주로 도예에 흥미를 가졌다. 행크 멀로이는 콜롬비아 대학(Columbia University)에서 회화와 드로잉을 가르쳤다. 그가 피터 볼커스를 만나 그릇 상점에서 함께 일했는데 볼커스는 Pot를 만들고 행크 멀로이는 그것을 장식했다. 멀로이는 또한 아름다운 말들도 만드는 조각가이기도 했다. 그는 정말 눈에 띄는 예술가였다. 그의 드로잉과 회화는 매우 환상적이었는데 젊은 나이에 죽어서인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작업은 매우 강하고, 흥미있으며, 기초가 튼튼하였다. 오티오에게 있어서 그의 드로잉이 가장 큰 관심사였고 회화와 조각에도 관심이 있었다. 그의 조각에서 등장하는 말(馬)은 중국 말의 영향을 받았고 그의 드로잉은 추상적이었으며, 붉은 색, 녹색의 형체에 검은 색으로 선을 그렸다. 자료가 없는 관계로 오티오의 드로잉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었는지는 밝힐 수 없지만, 말의 등장과 검은 색 드로잉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오티오의 작품과 유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와 같은 내용을 볼 때, 오티오는 멀로이에게 예술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고 후의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드로잉의 내용과도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어 진다. 아치브래이에서 조각으로 시작했다가 벽화 작업을 하면서 테라 코타 작업을 하였다. 몬타나 주에 있는 몇몇 건물들의 벽화를 담당하였다. 지금까지도 벽화 작업을 계속하고 있는데 주로 교회에서 벽화를 원했고 그래서 종교적인 내용을 다뤘다. 도자기와 도기류를 만들었고 약간의 조각도 했는데 말(馬)의 모양을 만들었다. 인디안 춤, 인디안 복장, 또한 그들의 조각을 통해서도 큰 영향을 받았다. 에스키모 조각도 좋아했지만 그의 작업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1952년에 아치브래이의 획기적인 사건으로 일본의 도예가 하마다 쇼지(Shoji Hamada)(도판 2)와 영국 도예가 버나드 리치(Bernard Leach)(도판 3) 그리고 철학자 야나기 소에츠(Soetsu Yanagi=야나기 무네요시)의 워크숍이 있었다. 그 당시 아치브래이에 레지던스작가였던 볼커스와 오티오는 이 사건을 통해 그들의 작업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이 후에 진정 도예가로서 흙을 대할 때 자유로움과 여유로움을 가지게 되었으며 작업에 임하는 태도에도 많은 변화를 주었다. 그들이 어떠한 새로운 테크닉을 가르쳐 주지는 않았지만, 정신적인 면에서 상당히 다름을 깨달을 수 있게 했다. 오티오는 그들과의 만남이 매우 인상깊었었다. 하마다 쇼지가 흙이라는 재료를 가지고 너무나 편안하게 다루며 물레를 돌리는 것을 보고 매우 아름답게 여겼으며, 손자국, 흙 덩어리들을 스폰지로 깨끗이 닦아 내지 않는 그 자연스러움에 감동을 느꼈다. 그러한 일본인들의 모습이 과연 자연스러움일까. 필자가 생각하기엔 그들의 자연스러운 솜씨이기보다는 너무나도 이론적인 틀을 잘 만들어 내는 일본인들의 발 빠른 계산에서 나온 모습이 아니었나 싶다. 선사상이니 뭐니 하는 ‘말(語)’ 들을 잘 만들어내는 그들에게서 부끄럽지만 배울 것이 많다. 한때는 볼커스와 함께 지거링(Jiggering)을 통한 슬립케스팅(slipcasting)으로 다량의 기프트 아이템(gift items)을 만들어 팔았다. 꽤 인기가 좋았다. 이것은 단지 생계를 위한 것이었고 그것과 함께 볼커스는 찻주전자, 찻잔, 병, 사발 등 아름다운 그릇을 만들었다. 오티오도 그러한 작업을 조금 했으나 볼커스가 주로 많이 벌었다. 그 후, 오티오는 덴버 테라코타 공장(Denver Terra Cotta Company)로 가서 테라 코타 벽화 작업을 하였다. 볼커스와 함께 했던 슬립케스팅의 작업을 차츰 줄이고 있을 무렵, 그는 조각과 기발한 아말감(수은과 다른 금속과의 합금)소재의 도기와 점토로 만든 Club Sandwiches(보통 3장을 겹친 토스트에 고기나 상추를 끼운 샌드위치)와 같은 그의 작품을 만드는데 시간을 투자하였다. 그러나 일본 작가들의 만남으로 피터 볼커스가 일보 전통 도예에 빠져들게 되었는데 그 영향으로 오티오도 사발형태에 매료된 것이 아닌가 싶다. 또한 가깝게 지내던 볼커스가 추상표현주의에 영향을 받아 작품을 만들었기에 오티오도 그러한 영향으로 여러 Pot을 제작하였을 것으로 보여진다. 가까스로 참아왔던 신인동형론(新人同形論)이 오티오를 예술가로서 지금까지 명성을 얻게 했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 오티오는 적은 양의 도예 작품을 남겼고,(도판 4) 1981년 핀란드 헬싱키의 아라비아(Arabia) 공장에서 연수하였다. 그는 대부분 자기질의 재료로 작업을 했는데 그 공장에서 석기질 재료를 사용하여 작업하면서 기술적인 어려움을 극복했다. 석기질 재료 작업으로 돌아오기 전에 그는 몇 개의 중요한 자기질 작품을 만들었다. Secrifice Of Iphigenia On Her Wedding Day(1983)(도판 5)에서 감정을 페인트칠 된 이미지 형상에 더하면서, Pot의 표면으로부터 돌출 되도록 말들의 머리와 같은 것을 삼면에 드로잉 하였다. 1982년에 오티오는 미국에 돌아와 재료를 자기질에서 보다 제작하기 쉬운 석기질로 바꾸었다. 1983년에 몬타나 대학이 그의 작품에 대한 회고전을 개최하였으며, 그 작품은 뉴욕에 있는 미국 공예 박물관(American Craft Museum)으로 옮겨졌다. 그 회고전은 오티오의 천재성을 엿 볼 수 있었으나, 작품의 일관되지 않은 선택, 수준이 떨어지는 카달로그와 설치상의 문제로 실망을 안겨주었다. 오티오의 작품에 대한 진정한 회고와 평가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2. 작품 세계 가. 형태 a. 제작 기법 처음엔 많은 도예가 들처럼 코일링 기법을 활용하여 기형을 잡아나가기 시작하였다. 그 밖에도 벽돌을 쌓아 올리 듯 빚어낸 흙판들의 끝을 서로 이어서 쌓아올리는 방법을 쓰기도 하였다. 덴버 테라코타 고장에서 기술자들이 몰드로 기형을 만들고 흙판을 찍어내는 것을 보고 배우기도 하였다. 여기서 배운 기술은 오티오가 당시 많이 가담하고 있던 공공 프로젝트에 사용할 테라코타 부조를 제작할 때 활용하였다. 이러한 판성형 기법은 점차 중요하게 인식되었고 상당히 경제적인 작업 방식으로 여겨져 현재까지 그의 작업에 이어지고 있다. (도판 4)와 (도판 6)에서 코일링 기법의 형태와 판성형 기법의 형태의 변화를 알 수 있다. b. 크기 대략 35×30×25 cm 정도의 중간 크기의 작품이 주로 1980년대에 있었다. (도판 7) 그 외, 70~100×50~80×70~90 cm 정도로 높이가 높고 폭이 좁은 십자형이다. c. 표면질감 및 유약 초기엔 흙의 거친 표면 느낌과 함께 색화장토를 입혔으며, 부분적으로 금속 광택이 느껴지는 러스터를 사용하였다.(도판 8-1)(도판 8-2) 후기에는 좀 더 부드러워지고 환해졌다. (도판 9-1) d. 색 다양한 색채로 초기에는 화이트와 블랙이 주를 이루었다. (여인의 형상과 동물들의 body는 화이트로 표현하고 배경이나 드로잉 선은 블랙으로 표현)(도판 10) 블랙 선이 굵게 사용되다가 점차 블랙 선이 가늘어지고 심지어 부분적 포인트로 쓰이기도 하였다. (도판 11-1) 강한 대비의 색감이 많이 쓰이다가 점차 파스텔톤이 사용되어 부드러워졌다.(도판 11-2) 나. 소재와 내용 인간과 동물(개, 말, 소 등)의 형상이 주된 소재이다. “주로 흙판으로 만든 나의 그릇들은 내가 젊었을 때 존경했던 잭슨 폴록, 데 쿠닝, 투르코브 등의 1950년대 뉴욕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이 발산했던 미학을 반영하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리베라, 오로츠코, 타마요와 같은 멕시코의 벽 화가들이나 일본의 노구치 등의 구상작품, 그리고 행크 멀로이와 마리노 마리니의 누드와 말, 피카소와 마티스와 샤갈의 회화등 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요즈음은 전세계 모든 장르의 예술가들이 나에게 그들의 비전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감동을 주고 있다. 근래에 나의 작업은 여러 가지 스타일의 변천과정을 거치면서 내가 지금 만들고 있는 부드러운 형태로 승화되었다. 추상적인 형태는 거침 면이 업어졌고 , 마치 부드러운 캔버스처럼 그 위에 그림을 그리고 초벌구이 유약을 바르는 것으로 변모하였다. 둥글고 풍성했던 도자기의 목부분은 이제 입체적인 드로잉과 페인팅의 도전적 가능성을 제공하는 3차원적 구근형의 세계로 탈바꿈하였다.“ (『누벨 오브제Ⅳ』, 디자인 하우스, 1997, p.284) 초기에 정면성이 강한 작품을 제작하다가 80년대 들어서면서 후면으로 돌아가는 부분을 자연스럽게 묘사하여 입체감을 표현하였다. (도판 9-1)(도판 9-2)(도판 9-3) (오티오의 생애를 중심으로 그가 기(器)를 바탕으로 작업하게 된 계기들을 연구했으므로 작품의 내용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이 부족함.)
Ⅲ.결론. 오티오는 몬타나의 뷰트라는 복잡하고 활동적인 광산 마을에서 태어났다. 도시와는 거리가 멀게만 느껴지는 마을이지만, 여러 소수 이민족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다양한 인종과 그들의 문화를 체험할 수 있었다. 또한 가장 중요하게 작용한 것은 그 지역의 훌륭한 교육 시스템에 의해 예술의 상당한 부분을 어릴 때부터 경험 할 수 있었던 점이다. 예술을 느끼고 표현하는데 있어서 ‘경험’ 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게 작용하는지 본 작가의 연구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었다. 오랫동안 그가 기(器)의 형태를 지닌 작품을 제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는 처음에 조각으로부터 학교 생활을 하다가 도예로 진로를 바꾸었다. “그릇에 대한 나의 관심과 그 뿌리는 그릇의 원형(原型)에 대한 이해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그리이스와 미노아의 도기, 그리고 이탈리아 르네상스시대, 피카소와 레제의 현대 도예, 동양의 도자기를 언급할 수 있다. 대학 시절 미술사 시간에 배웠던 고대의 디자인은 나를 사로잡았다. 그 때 나는 그리이스의 형태는 물론 생동감에 넘치는 운동선수들과 동물로 장식된 시각적 기록으로서의 드로잉을 숭배했었다. 나중에는 도자기를 생산하는 메카니즘과 도예가가 물레 위에서 기형을 만들 때 그의 육체적인 몸놀림에서 나오는 리듬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모든 자극적인 요소들의 결합은 내가 그릇을 중요한 예술 형식으로 인식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누벨 오브제Ⅳ』, 디자인 하우스, 1997, p.282) 그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작품에 있어서 기(器)의 형태는 경험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어떠한 뚜렷한 목적의식으로써의 기(器)라기보다는 관심을 통해 나타난 현상이라 생각되어진다. 그리고 젊었던 시절, 대학에서의 피터 볼커스와의 만남으로 여러 가지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일본의 저명한 도예가인 하마다에 의해 정신적인 유대감을 맛보았고, 기술과 영혼의 일치, 탐험 정신과 존경할 만한 예술적 영감에 큰 감명을 받아서 그것들로 인해 오티오의 삶 속에 ‘기(器)‘ 가 뿌리 깊게 작용하였을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루디 오티오는 도자기를 만들면서도 회화에 지대한 관심을 끊임없이 갖고 있었다. “.... 아직 얼마나 더 지속될지는 모르지만, 나는 바로 이러한 3차원적인 드로잉과 페인팅의 세계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시각을 발견하고 있다. 즉, 과연 내가 입체적인 형태 위에 의미를 잃지 않으면서 연속적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한계는 어디까지인가를 발견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회화의 세계가 고개를 들고 중요하고 섬세한 요구로 다가오기도 한다. 가끔은 구조의 명확성을, 한편으로는 좀 더 편안함과 부드러운 해석을 동반한 절충안을 요구하기도 하는데 결국은 모든 감각이 하는 말에 항상 귀기울여야 한다. 나이가 들면서 내가 새롭게 발견한 것은 가끔 곁눈으로 사물을 보면서 그리는 것이 더 좋을 때도 있다는 사실이다. 예술가는 항상 전체를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슴과 귀 모두로 듣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절실하게 든다.“ (『누벨 오브제Ⅳ』, 디자인 하우스, 1997, p.284) 많은 이들은 그를 ‘회화적이 용기를 제작하는 작가’ 라 칭하며, 그는 도자기를 캔버스로 그림을 그리는 작가라 말하곤 한다. 하지만, 도자기를 단지 캔버스라 하기엔 그 이유가 너무나 단순하다고 생각된다. 단지 그림을 위해서 도자기를 도구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티오 개인에게 있어서 기(器)는 삶의 경험을 표출해내는 중요한 자료와도 같은 것이라 생각되어진다.
참고문헌 ․신상호, 『현대도예 미래를 향한 움직임』, 홍익대학교 도예연구소, 1993 ․『월간 도예- 아치브래이재단 50주년 기념행사-2001: Clay odyssey』, 2001, 5月호 ․Edited By Barbara Perry, 『American Ceramics: Everson Museum of Art』, New York, Rizzoli International Publications. Inc, 1989 ․Garth Clak, 『American Ceramics: Abbeville』, New York,1987 ■ 논문 ․최지만, 『器의 개념 擴散에 관한 연구:1970~80년대 美國의 도예상황을 중심으로』, 서울: 홍익대학교, 1997 ․조한기, 『現代陶藝의 形成에 있어서 抽象表現主義가 끼친 影響:Peter Voulkos의 作品世界를 中心으로』, 1993 ■ 인터넷 싸이트 ․http://www.studiopottery.com ․http://www.stoke.gov.ak/museums ․http://www.artmuseum.org ․http://www.artarchives.si.edu/oralhist Smith sonia, Archives of American Art ORAL HISTORY INTERVI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