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과 불에 사른 고독한 영혼
김권태 추모전에 부쳐

정관모(청년작가회 명예회장)

김권태는 부산공예고등학교의 도자공예반과 경희대학교 요업공예과 및 동대학원에서 도자예술을 연구하고 한 사람의 전문인이 된 후, 한국미술 청년작가회 회원으로 활동하다가 早逝(조서)한 작가이다.
그의 작가경력은 그가 이승에서 살다간 세월만큼 짧다. 그러나 김권태만큼 흙과 불에 그의 고독한 영혼을 뜨겁게 사르고, 굵게 살다간 생애도 흔치 않으므로, 오늘 그의 친구들이 그를 기리며 추모전을 갖게 되는 것이리라.

김권태의 작가적 역량은 이미 부산공예고등학교 재학시에 제작했던 <두 마리의 닭>모자이크 작품에서 나타났고 대학재학중엔 이미 하나의 주제를 놓고 심도있게 연구하고 造形(조형)해간 작가로 입문하고 있었다.

그의 작품을 보면 3단계로 변화해간 양상을 볼 수 있다.
1단계에 해당하는 작품으로는 <선의 변형>과 <산>의 연작들이다. 그 작품들은 선과 면의 구성을 통한 입체물로서 조형의 기본에 충실한 흔적이 엿보인다. 다시 언급하거니와 그는 조형훈련에 전력한 것으로 보여진다.
2단계는 <탑>의 연작들이다. 그는 필경 자기완숙을 위해 자신과 투쟁하는 삶 속에서, 돌을 쌓는 어느 구도자의 기도처럼 탑신을 쌓아가며 생의 의미를 찾아갔던 것 같다.
그리고 3단계는 <사람>의 연작들이다. 이 작품들에서는 그가 인간사회에 관심을 갖고, 그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려 했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그 무렵 한국미술 청년작가회에 입회하여 많은 동료들과 함께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국의 陶藝史(도예사)는 실로 오래되고 대단히 훌륭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현대도자조각(Ceramic Sculpture)의 실상이 先代(선대)를 따르지 못함은 조형성의 결여 때문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김권태는 기본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방편으로 최소한의 生活磁器(생활자기)를 굽고, 나머지의 모든 정열로는 순수조형의 추구에 진작했었다.
그는 참으로 근면했고, 어떻게든 자립하고자 많은 어려움을 잘 이겨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말이 적고 겸손했다. 때문에 그의 많은 동료들이 그를 아끼고 사랑하고 기대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알 수가 없다. 그의 영혼이 하늘을 향하고, 그의 육신이 한줌의 재로 변하여 떠나가던 날, 그를 보내던 많은 이들의 오열은 그가 생전에 즐겨 부르던 <제비>와 뒤엉켜 나의 가슴을 적시고 있었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는 말을 인용하기조차 안타까울 만큼 그는 너무나 일찍 갔고, 말없는 그의 작품들만 이렇듯 우리 곁에 남아 있는 것이다.

1990. 12



김권태의 삶과 예술

지 미 정 (미학·부산공예고등학교 동문)

짧은 세월이었지만 우리는 이쯤에서 그의 삶을 정리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결코 질적인 부족의 상태가 아니며 미완으로 끝났을 뿐이다.
나는 김권태를 요절한 많은 예술가들처럼 천재로 승격시키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그의 성실하고 겸허한 삶의 자세가 누구의 그 무엇보다도 값진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주의를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며 달리고 계단보다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수직상승하기를 원한다. 김권태가 그러한 삶의 방식을 택했더라면 지금쯤 내가 이렇게 고통스런 글을 쓰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의 직접적인 사인은 스스로 가스 질식으로 판명이 났지만 그러기까지에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작용했다고 본다. 단순한 부주의라기보다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타인의 일, 주변의 일들을 도맡아 오다 지칠 대로 지친 그의 육신이 그 상황을 감당해내지 못했던 것이다.

전시는 그가 첫 개인전을 정해놓았던 일정을 그대로 실현시킨 것이다. 그가 살아서 손수 이 전시를 준비했더라면 좀더 완성된 그의 작품세계를 볼 수 있었겠지만 그가 우리를 안타깝게 하는 일이 어찌 이뿐이겠는가.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가 작품에 임해온 과정들을 모아오면서 그의 손길을 다시 한번 느끼는 일일 것이다.

여기에 전시되는 작품들은 대부분 그의 본격적인 작품시기인 86년에서 89년 사이에 제자된 것들이다. 공예학교시절부터 이미 웬만한 도예과 이상으로 많은 실습을 했던터라 우선 형식적인 면에서 그의 작품들은 대단히 견고하다. 그러나 당시는 예술을 추구한다는 생각보다는 순수하게 공예의 의미에 충실해야 했으므로 器物(기물)이 주가 되었으며 그가 어떻게 전통적인 공예의 개념을 탈피해서 순수조형의 형태로 나아가는 가를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주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자연과 인간, 그리고 신앙이 그것이다. 이들은 가장 원시적이고도 중요한 주제들이다. 이러한 주제 내용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삶에 진지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자연에서 가장 큰 소재는 산이다. 비교적 일찍부터 시작된 <산> 연작은 자연의 형상을 기하학적 형태로 환원시켜 표현하고자 하는 치밀한 계획을 보여준다. 가장 초기의 산은 도예이기보다는 차라리 금속판을 이어 만든 조형물처럼 보인다. 계속되는 <산>들에서 조금씩의 변화와 유동성이 보인다. 색채가 가미되고 딱딱한 선은 조심스런 변형을 보이는데 여기서 抽象化(추상화)에 대한 그의 갈등들이 드러난다. 어떤 형태의 관념을 깨고 그것의 본질을 추출하여 다시 재조합 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시도들이 필요한가. 세잔느가 미술사에 길이 남는 생 빅트와르 산을 그리기까지 그는 그곳에서 얼마나 많은 생 빅트와르 산을 그렸던가. 형태의 본질, 그것이 진지함을 아는 사람은 그것을 탈피하는 데 과감할 수가 없다. 느리고 지루하게 그렇게 해서 형은 서서히 변해가는 것이다.

이러한 추상화 작업은 87, 88년에 제작된 <선의 변형> 연작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철근구조물처럼 견고한 형태들은 한 곳에서 출발하여 복잡하게 얽혀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온다. 흙으로 만들어내기에는 불가능한 듯이 보이는 파이프형들이 연결되어 단단한 접합구조를 이룬다. 한쪽 입구에 대고 공기를 불어 넣으면 그것은 전체를 돌아서 다른 한쪽으로 되돌아 나온다. 마치 자연의 생명선처럼 모든 길들은 통해 있다.

사람 연작은 그가 인간에게 가졌던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다. <남과 여> <가족>들은 언제나 정답게 서서 우리를 바라본다. 器(기)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평면의 가장자리에 여성과 남성의 성적 상징들이 조심스럽게 나타난다. 처음에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표현할까 하다가 결국에는 절제된 형태로 완성을 보인다. 모든 것이 조심스럽다. 그러나 우리는 한눈에 그 이미지를 파악하고 미소 짓게 된다.

사람연작이 인간에 대한 그의 관심과 그의 휴머니티를 느끼게 하는 유머러스한 작업이라면, 또 하나의 중요한 연작물인 <탑>들은 보다 심화된 정신성을 표현하고 있는 작품들이다. 탑은 종교적인 건축물이다. 그러나 그의 탑은 굳이 종교를 강조하는 엄숙한 탑이 아니라 편안한 마음의 신앙, 우리 민족의 정취를 느끼게 해준다. 주발, 빗살무늬 토기를 엎어놓은 듯한 탑의 기단 위에 차곡차곡 쌓아 올라간 탑의 우아한 자태는 한복을 입은 우리네 여인상처럼 단아하다. 신라인의 정서가 이러했을까. 어디서도 본 적 없지만 그렇다고 결코 낯설지 않은 독특한 형태와, 흙의 분위기를 잘 나타내는 따뜻한 표면 색조가 이루어내는 온화한 조화 속에서 우리는 무한한 과거로 거슬러가는 초시간성으로 안내된다.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예술세계가 여기서 끝나게 된 것은 우리 모두에게 슬픈 일이다. 그의 작품은 공예라고 부를 성질의 것이 아니다. 도자예술의 차원에서 이토록 민족정서가 강하게 풍기는 작품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그는 오늘날의 우리 도예가 나아가야 할 하나의 방향을 설정하고 그 길로 매진하려는 순간에 우리의 곁을 떠난 것이다. 이러한 이 시점에서 마련된 이 전시회의 의의는 친구의 죽음을 위로한다는 소박한 차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인간이 낳은 아름다운 조형물을 다 함께 향수하고, 나아가 한 인간이 남긴 진지하고 따뜻한 삶의 흔적을 통해 이 척박한 세상에 온기를 주는 조그만 불씨를 나누어 갖자는 데 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그의 작품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나니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 웬지 그의 영혼이 자신의 작품이 있는 이곳 저곳을 옮겨 다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이 세상에 남기고 간 것은 오직 이 작품들뿐이다. 성실하고 아름답게 살다간 그가 낳은 이 조형물들 앞에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산(w:50cm, d:30cm, h:30cm),1986

탑(w:15cm, d:15cm, h:70cm),1988

남과 여(w:40cm, d:12cm, h:65cm),1988

가족(w:50cm, d:10cm, h:68cm),1989

선의 변형(w:16cm, d:13cm, h:13cm),1986

선의 변형(w:40cm, d:30cm, h:17cm),1987

器(w:28cm, h:27cm),1986

무제(w:20cm, d:12cm, h:45cm),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