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된 心象(심상)의 복원의지
글/최공호(工藝史家)
작가 박경숙과의 인연은, 필자가 공예를 전공하기 시작한 학부시절부터이니 그럭저럭 10년 남짓이 되는 셈이다. 그때 우리과의 조교였던 그는 쾌활하고 의리 있는 다혈질의 성품 뒤에 의외로 보수적이고 잔잔한 애상적 분위기를 함께 지닌 선배로서, 적어도 필자에게는 대학인의 이상처럼 비쳐졌으며, 그 독특한 분위기로 인해 도자전공 학생들보다 오히려 전공이 다른 우리와 더욱 도타운 정을 나누었다고 지금도 믿고 있다. 그러한 인간적 친밀감 때문인지 서로가 일에 쫓겨 만나지 못한 채 지내오면서도 주변의 알만한 사람들이 건네주는 한 두 마디의 안부를 통해 4,5년의 시간적 간극을 거뜬히 매꾸곤 했다. 그러나 오랜 만에 본 그의 작품들은 최근의 공예계에서 일고 있는 이른바 탈장르적 경향을 띤 조형작업으로 일변해 있었다.
필자가 공예사를 공부한다는 어줍지 않은 소신과 공예를 사회경제사적 관점에서 이해해왔던 나름대로의 입장을 유보하면서까지 그의 조형작업에 관해 언급하려는 것은, 내 개인적 입장에서 앞서는 인연의 깊이를 능가할 만한 명분을 쉽게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평문을 쓴다는 것보다 그간 미루어왔던 오랜 만의 해후의 방편쯤으로 담담하게 이 글을 서술해보려는 것이다.
산과 강줄기, 갈대, 철로, 들녘과 다리등을 소재로 하여 전개되는 그의 조형세계는 '85년을 기점으로 조형관에 근본적인 변화를 겪은 뒤에도 일관성을 보이고 있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이러한 소재들은 그간의 작업경륜을 통해 이미 조형적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지만, 사실은 개개의 소재들이 제각기 실제의 경험에 토대를 둔 특수한 心象인 것이다. 오래 전에 부산시로 편입되면서 파괴되어간 낙동강과 을숙도 근처의 갈대, 경부선 철도를 가로질러 터널 밑으로 흐르던 실개울과, 그 너머에 반쯤 허리가 걸려 절묘한 조화를 이루었던 건너편의 토산들이 그것이다. 작가는 지금까지도 언덕마루의 집 옥상에서 바라다본 유년시절의 자신을 감싸주었던 그곳의 풍정들을 가슴 깊숙이 간직하고 있다.
오래전의 이 단상들이 시공간적 격차는 물론 몇 차례의 조형적 변모과정을 거치면서도 오늘 그의 조형세계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것은, 어느날 문득 돌아가 본 고향의 풍정이 도시화의 과정에서 철저하게 매몰되어 가는 모습을 목격한 순간, 동시에 자신의 심상들이 낱낱이 해체당하는 고통으로 공감하면서, 그것이 이미 자신의 일부로 깊게 肉化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터널을 지나 들녘으로 길게 꼬리를 감추곤 했던 철로는, 유년기의 닫혀진 사유공간을 외부세계로 이어준 유일한 수단이었으며, 미래에 대한 상상력과 서울행, 오늘의 작가의 길을 배태해준 사유의 온실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조형세계의 핵심은 산업화의 파괴적 역기능에 대한 본능적 거부감을 강한 복원에의 의지로 승화하면서, 궁극적으로는 문명비판적 시각에 귀착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는 다른 발상원에서 출발한 작업의 결과가 늘 여기에 회기되어지는 사실에 스스로 놀라곤 했던 것이다.
이번 전시회에 출품된 아치형과 반원에 가까운 부정형으로 처리된 일련의 형태는 구의 조형세계를 이해하는 데 좋은 단서를 제공해 준다. 일정한 거리를 둔 두 개의 독립된 매스에서 출발하여 오랜 집적과정을 통해 상층부에서 서로 이어지면서 둥그런 기본 틀을 따라 크고 작게 골과 볼륨을 반복적으로 형성해내는 아치형은, 지금도 살아 꿈틀 대는 유년기의 산의 표정이자 산의 상징으로 현현된 것이다. 그리고 부정형의 반원을 이룬 일련의 또다른 유형들은 하단부 중간에 반듯한 사각의 기하학적 공간을 설정함으로서 자칫 회화적 평면으로 흐르기 쉬운 외형에 긴장과 활기를 불어넣어 주면서, 한편으로는 개울을 감싸고 서있던 다리와 그 위를 가로질러 산자락으로 사라진 유년시절의 철로변 풍경을 끌어내 복원해 놓은 것이다.
이와같이 매몰된 유년기의 기억에 대한 온전한 복원과정을 통해 오늘날의 문제로 환원해 내려는 일관된 그의 조형과정은, 제작과정에서도 발상의 완결을 위해 보다 쉬운 방법들에 눈을 돌리지 않는다. 적절한 공간을 사이에 둔 채 각각의 짝을 수작업에 의해 일일이 쌓아 올라가면서, 흙줄말기와 적층과정 자체를 곧 손상된 심상의 복원과정으로 삼고 있으며, 집적된 적층의 극점에서 서로가 필연적으로 만나 교통할 수 있게 하려는 의도인 것이다.
그가 오랫동안 흙의 본질에 경도되어 왔던 것도, 흙이라는 재질 자체가 갖는 원초성이 그의 조형의 발언지 구실을 했던 생장환경의 시공간적 원초성과 긴밀하게 맞물려 각각의 소재들을 조형적 완결로 이끄는데 효율적인 요소가 되어주고 있다.
이상과 같은 박경숙의 조형세계를 굳이 갈래지어 본다면 근래의 미술계 전반에 불어 닥친 탈장르 경향과 친연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출발점은 다소 다르다 할지라도 문명의 역기능적 측면에 강한 비판적 시각을 깔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회화분야에서 시작된 탈장르 경향이 모더니즘의 한 극복방안으로 출발되었다는 일정한 의의를 지니고 있지만, 지금 그 분야 내에서도 그것이 바람직한 극복방안이었는지에 관해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물론 오늘의 공예적 환경이 전시기까지의 한계와 그 극복을 위한 새로운 시도의 필요성과 극대화된 시점에 이르러 있음도 또한 사실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공예분야에서 시도되고 있는 조형화를 통한 이러한 탈장르적 경향이 회화분야의 그것과 동질의 가치를 부여받기는 힘들며, 오늘의 공예적 환경을 개선하고 당면한 시대적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효한 방법인지에 관해서 한번쯤 진지한 검토가 이루어져야 할 시점에 와있다는 점도 아울러 지적해 둘 필요가 있다.
이러한 몇 가지의 아쉬움은 器彫的 토대 위에 쌓아올려진 그의 탄탄한 작가적 역량과 사유의 깊이로 하여 충분히 극복되어가는 모습을 기대할 수 있게 한다.
(w:48cm, d:16cm, h:42cm)
(w:55cm, d:17cm, h:58cm)
(w:54cm, d:18cm, h:47cm)
(w:50cm, d:15cm, h:43cm)
(w:64cm, d:16cm, h:50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