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 대한 성찰과 또 하나의 해석
- 인간은 바라보는 임미강의 시각에 대하여 -

윤 진 섭 ( 미술평론가 )

"일반적으로 작가란 독립된 개체이기 이전에 종횡으로 수업이 교차되는 관계들의 그물 속에서 살아가는 가운데 전혀 새로운 어떤 것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이다. 위로는 미술사라는 거대한 전사(前史)와 허다한 선례들이 있고, 옆으로는 자신이 속해있는 사회적 전통과 숱한 시방식들이 존재한다. 작가는 또한 동료작가들, 관객, 화랑관계자, 비평가, 저널리스트, 고객들과 싫든 좋든 부대끼며 살아가게 마련이다. 운명적으로 내던져진 자들을 일컬음일 터이다."
다소 긴 인용을 무릅썼지만, 어느 작가의 작가론 속에서 언급했던 나의 미 말은 현대를 살아가는 예술가들의 고뇌와 창작의 한계, 그리고 예술상황의 어려움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그것은 곧 시시각각으로 변해가는 문화 환경의 조건 속에서 어떻게 하면 가치있는 예술적 산물들을 창출해내는, 나아가서는 자신의 입지를 탄탄히 다져 나갈 수 있느냐 하는 존재론적인 질문과도 부합된다.
이 말은 또한 오늘의 예술가들이 처한 특수한 예술적 환경과 예술과 사회, 예술과 과학, 또는 각 예술장르간의 상호 연계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도 하다. 그만큼 오늘을 살아가는 예술가들은 폭증하는 정보와 쌓여만 거는 기술축적의 틈바구니 속에서 동료 예술과들과 경쟁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긴박감을 느끼고 있다.
금세기 초엽부터 대두되기 시작한 탈장르현상을 그간 선명하게 구분 지워졌던 장르간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각 장르들이 지닌 고유의 특성을 희석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예술철학 분야에서 첨예한 쟁점으로 대두되기도 했던 금세기 예술의 이와 같은 특징은 예컨대 회화와 조각, 조각과 도자예술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게다가 '참신성'과 '새로움'을 예술표현의 핵심요건으로 삼도 있는 현대 예술의 추세에 따라 도자예술을 비롯한 공예분야에서도 그간 핵심개념이었던 '쓰임'은 지양하고 작품자체를 '표현'을 위한 매개물로 여기는 추세가 더욱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임미강은 학부에서 도자공예를 전공한 작가이다. 그녀 역시 학부에서의 연구기간에는 전통적인 의미에서 '쓰임'이 강조된 기능위주의 작품제작에 골몰하였다. 기능성이 강조된 도자공예란 곧 겉모습이야 어떻든 거기에는 '쓰임'이라고 하는 단서가 늘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고,따라서 작가는 이와 같은 규범을 파기시켰을 때 거기에는 의당 '전통으로부터의 이탈'이라는 심리적 부담이 작용하게 마련인 것이다. 임미강의 다음과같은 진술은 작가가 전통으로부터 과감히 탈피하고자 할 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심정을 나타내 주고 있다.
"나의 작업은 내게 있어서 현대에 대해 되묻는 작업의 연속이다. 도자기 공예로 시작한 나의 흙작업은 도자기 공예가 갖는 전통이라는 자리가 항상 내 작업에 남아있어야 된다는 관념에 눌려 왔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부터 서서히 자유로울 수 있었으며, 그것이 자연스럽게 내 작업에 수용될 수 있었던 것은 현재 우리 모습에 대한 작업을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작업은 우리 모습에 대한 일련의 변주곡으로 이어진다.(작업노트)
80년대 중반, 임미강은 전통도예, 혹은 전통적인 도예의 개념과 현대적인 예술관념, 혹은 작가의 자유로운 상상력의 분출이 가져다 주는 딜레마에 빠져있다가 도독을 감행하기에 이른다. 보다 폭넓은 세계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익히는 가운데 자신의 작업을 추스르고자 했건 그녀는 서구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경향과 자유스러운 발상, 거리낌 없는 창작태도와 접하게 되는 것이다.
"현대미술의 거창한 이념들에 얼마동안은 압도당하고, 내 작업이 그처럼 진부하게 느껴질 수 없었던 시간도 있었다. 하지만 서구에서 일어난 현대미술 이념들은 그 사람들 속에서 일어날 수 있었던, 그리고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것이란 걸 절실히 실감한 때가 있었다. 팝아트라는 말을 학교 때 듣고 대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모른다는 것이 마치 죄인 양 슬쩍 넘어가 버렸다. 그후 독일 유학시절 잠시 뉴욕의 여러 미술관과 그들이 사는 모습을 보며 앤디워홀의 거대한 깡통작업이 왜 만들어졌는지 그들의 수퍼마켓을 가보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작업이란 내가 밟고 있는 이 땅의 시간을 그리고 같이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엮어내는 것이 가장 큰 의미를 준다는 것을 재인식하게 되었다.(작가노트)"
임미강에게 있어서 독일유학은 하나의 분기점을 이룬다. 그것은 첫째, 도자예술에 대한 작가 자신의 관념이 기존의 틀을 벗어나 과감한 수정을 겪게 되었다는 점, 둘 째, 그 결과 그녀는 전통적인 도자예술의 개념이었던 '쓰임'으로부터 벗어나 자아의 성취, 혹은 표현의 장이자 매개체로서의 '도자'내지는 '도조'의 영역을 찾아가기 시작했다는 사실에서 엿볼 수 있다. '인간' 혹은 인간을 싸고 도는 문제들이 임미강 작업의 주요 모티브로 떠오르게 된 것도 이 무렵부터 비롯된다.
'85년에서 '88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임미강이 제작했던 일련의 「마스크」연작들은 비교적 도자예술의 본령에 충실하면서도 내용적으로는 '이야기성(서술)'에 한발 들여놓은 상태로 그녀의 의식이 접근해 가고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도판이나 사각의 입방체, 혹은 항아리와 같은 기형에 데드마스크를 연상시키는 얼굴의 모습이 어렴풋하게 묘사되어 있는 「마스크」연작은 그것들로부터 풍기는 묵상적인 체취와 함께 죽음이 연상시키는 비릿한 내음을 발산하고 있다.
그러나 임미강 작업의 전개에 있어서 주된 모티브가 시종일고나 인간에 관한 것으로 점철되었던 것은 아니다. '88년 무렵을 전후하여 그녀는 점토 위에 예리한 선묘를 가한 뒤 화장토를 바르고 닦아냄으로써 그로부터 나타나는 다양한 표면 질감 따위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들은 「기억」이라는 제하의 도판작업에 집약되기에 이른다. 이를테면, 도자와 회화와의 접맥, 또는 도자와 소조와의 혼융이랄 수 있는 일련의 작업들은 임미강 작업의 전개에 있어서 비록 한시적으로 나타나는 경향이기는 하지만 이 때 체득된 마치 바람벽을 연상시키는 거친 표면 질감이라든지, 날카로운 상채기, 혹은 소성과정에서 나타나는 점토색의 미묘한 뉘앙스 등은 이후에 이어지는 '인간'시리즈와 결합되는 가운데 임미강 특유의 조형언어를 구축하게 되는 것이다.
1988년 이전, 예의 지극히 추상화된 형태의 도판 드로잉작업과 함께 한편으로는 '인간'시리즈에 몰두하고 있었던 임미강이 본격적인 모티브의 변주를 시도하게 된 것은 대략 88년도부터이다.
「군상(1988)」,「두 연인(1987)」과 같은 인간을 모티브로 한 맥락을 좇아가 일층심화의 과정을 밟고 있는 이들 연작들은 보다 구체적인 인간적 내음과 서술성을 바탕에 깔고 있다. 코일링 기법과 파내기 기법, 그리고 판 작업을 병행해 나가는 가운데 구축된 이들 인간시리즈는 얼굴의 반쯤이 뭉청 잘려 나간 상태의 단순성과 흉상구조, 그리고 이들 작업을 여러 개 병치해서 늘어놓는 설치방식에 힘입어 '소리'의 정서를 짙게 풍긴다. 어떻게 보면 조지 시걸의 군중시리즈나 아바카노비치의 군상작업에서도 맡아지는 현대사회의 본질적인 인간의 고독과 소외감을 비교적 단순한 구조로 드러내고 있는 듯한 임미강의 도조작업은 그렇기 때문에 지극히 서술적이다.
임미강의 작품이 지닌 서술적인 요소는 그녀가 즐겨 사용하는 디스플레이 방식인 설치에 의해 보다 강화된다. 전시장 전체를 하나의 통합된 장으로 파악하고 일련의 시각적 장치를 베풂으로써, 연극적인 효과와 함께 작품이 지닌 '이야기성'을 만유감없이 표출시킬 그녀의 금번 개인전은 '인간'에 관한 우리의 관념에 또 하나의 색다른 해석을 첨가하게 될 것이다.



군상'92 (w:60cm, d:10cm, h:100cm)

침묵(w:60cm, d:5cm, h:60cm)

다섯 사람(w:w:88cm, d:12cm, h:78cm)

변주곡, detail

변주곡(w:90cm, d:50cm, h:75cm)

심상'92 (w:54cm, d:3cm, h:70cm)

도시의 장승(w:56cm, d:3cm, h:150 / w:54cm, d:3cm, h:160cm)

사각앞에서(w:50cm, d:10cm, h:145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