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思惟와 體驗을 잇는 架驕, 그 詩的 表徵의 世界"

Ⅰ.
'70년대 후반부터 부분적으로 시도되었던 우리 공예계의 조형화 추세는, 이를 선도한 일군의 도예가들을 중심으로 하여 뚜렷한 활동기반을 구축해 가고 있다. 쓸모로부터의 해방을 관건으로 한 이른바 脫機能的 조형주의는, 기능의 효율성에 주된 관심을 쏟아왔던 기왕의 공예적 상황에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공예계 전반에 '공예의 本嶺이 무엇인가'에 대한 심각한 논의를 촉발시키기도 했다.
그 동안 공예의 핵심적 형성원리로서 묵수되어 왔던 기능의 문제가 이들 작가들에게 오히려 자유로운 조형표현을 저해하는 걸림돌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형식의 문제제기가 출발부터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당연하며, 현재도 이 문제는 일시적으로 잠복했을 뿐 완전히 불식된 것은 아니다.
공예에 있어서 조형주의는 '50년대로 소급되는 일본의 走泥社 작가그룹이나 미국의 Peter Volkos 등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우리의 경우에는 이들 국가와 상반된 입장에서 겪은 특수한 근대기의 역사적 경험이, 해방 이후 주체적 역량의 회복이라는 시대적 과제와 맞물려 공예적 여건의 변화에 대응한 문제의식이 비교적 뒤늦게 표출된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예계의 조형화 추세는 근대 이후에 획기적으로 재편된 수요환경과 제작구조 등 공예환경과 제작구조 등 공예환경의 총체적 변모에 수반된 필연적인 결과로 해석해 볼 수도 있다. 그것이 변화된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시대적 기능을 올바로 수행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지만, 공예의 존재를 지탱해 온 기능과 조형의 두형성원리가 디자인과 순수미술 분야에 각각 중첩되면서 상대적으로 그 영역이 위축되었던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따라서 그 동안 여러 가지 이유로 회피하거나 유보되었던 이 분야에 대한 평가가 전통적인 제작경향과 더불어 정당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까지의 접근방법이 전통주의나 모드니즘 중 어느 한편의 입장만을 반영하는 편향된 것이었다면, 이들 두 영역을 모두 포섭하는 통합적 시각에서 객관적인 관점과 판단의 틀을 갖추는 일은 공예계의 미래와 관련해서도 매우 중요한 것이다. 더 이상 어느 한편에 치우치거나 흑백을 가르려는 태도는 청산해야 할 분단시대의 이분법적 논리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Ⅱ.
박경숙의 경우도 결과적으로는 조형주의의 포괄적인 범주에 속하는 작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동안의 작업여정과 조형관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그가 통상의 분류기준으로 묶어내기에 합당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의 조형관이 근본적으로 다른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음은 물론, 주변이 온통 새로운 조형실험에 몰두해 있을 때도 그는 묵묵히 일관된 작업태도를 견지하면서 그 결과에 대한 분명한 이유와 근거를 찾기 위해 애써왔기 때문이다.
'그럴듯한 이념이나 복잡한 형식주의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진실 된 목소리에 솔직하고 내밀하게 귀기울여 보려한다'는 그의 작품에서 가시적인 변화가 나타난 것은 반복적인 검증을 거친 한참 후인 '85년 무렵이었다.
'90년에 이어 두 번째인 이번 전시회에 출품된 그의 작품들이 각별한 관심을 끄는 것은, 밀도 높은 조형어법을 바탕으로 하여 조형율을 詩的 表徵의 세계로 표출해 냄으로써 앞 시기와 구별되는 뚜렷하고 점증적인 변모의 촉을 가늠케 해 준다는 사실에 있다.
박경숙은 스스로 유독 다리와 인연이 깊다고 믿고 있다. 유년시절, 그의 정서의 주된 형성인자 가운데 하나로서 을숙도 근처의 유현한 풍정과 작은 징검다리에서 비롯된 다리와의 인연은, 지금까지도 그의, 삶터 곳곳에 존재하는 또다 른 다리들과의 만남을 통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른 아침 베란다에서 내다보이는 성산대교와 매일 지나는 작업실과 집 사이의 다리, 심지어는 우연히 방문한 강변 어느 집의 거실 가득히 들어찬 도심 속 다리의 모습 하나까지도 그는 늘 예사롭지 않은 느낌으로 맞이하곤 한다.
아침저녁, 계절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생동하는 다리 표정과 그 너머에 숨겨진 실상들, 우리들 정서에 수렴하는 갖가지 상징체계도 함께 읽어 낸다. 사람들 사이의 친화와 반목, 집단이기주의와 이데올로기 등 갈등과 대립의 구조적 모순들을 하나하나 들추어내려는 것이다. 그리고 육중한 무게로 버티고 선 콘크리트 빌딩 숲에 처연하게 걸린 다리의 모습을 통해, 도회적 삶에 지친 우리들 감성의 저변 깊숙이 앙금으로 가라앉은 인간다움과 서정의 자락들을 승화된 시적 조형율을 통해 길어 올리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
박경숙에게 있어서 다리의 존재는 자신의 사유와 체험의 세계가 긴밀하게 맞닿은 정점에 위치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그는 과거와 현재의 삶을 담담하게 투영해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의 정서를 오늘에 온전한 모습으로 간직할 수 있는 것도 다리를 매개로 하여 시공간의 간극을 거뜬히 메우는 경험의 전이현상의 결과로 믿고 있으며, 조형단위로 하여 각각을 독립시키거나 병치, 또는 융합하는 등 세가지의 유형으로 일별된다.
세 개의 원통형이 엇갈리게 병치된 작품 역시 결과적으로는 독립된 조형단위들과 긴밀하게 교감하면서 조형의 다양한 변주와 내적 통일성을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부정형의 곡선을 주조로 한 이 일군의 작품은 각각 흙줄말기로 집적된 율동적 윤곽과 굴곡진 볼륨을 반복적으로 형성하면서, 때로 윗면과 측면의 일부를 과감한 단면으로 처리하거나, 마치 한 다발의 갈대가 일렁이듯 일정한 방향성을 지향하기도 한다. 이 작품들은 그가 첫 전시회에서 부분적으로 시도했던 작업과 일련의 친연성을 보이면서도 한층 완성도 높은 조형율을 구현하고 있다. 그리고 컷팅된 단면에 부분적으로 처리한 흰색과 전면에 넓게 분포한 잔잔한 다갈색조의 유색이, 유약을 바르지 않은 태토바탕의 까실한 표면질과 어우러져 미묘한 조형적 상승효과를 거두고 있다.
이 가운데 특히, 일견하여 철조 구조물을 연상시키는 독립된 일군의 시리즈들은 콘크리트와 철근 덩어리로 뒤덮인 도시환경과 다리의 존재를 동시에 상징하면서 형태는 물론 색채에서도 빼어난 조형적 완결을 이루어내고 있어 주목된다. 흑색 바탕의 매끈한 원통형 다리와 상층부에 깊숙히 맞물린 사각판의 강직한 형태에 시유된 무르익은 옥수수의 가을빛, 또는 암록색조의 깊은 유빛과 함께 탁월한 조화를 이루어. 마침내 매스와 볼륨감을 증폭시키는 데도 일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형태와 색채의 절묘한 조화로 빚어낸 박경숙의 작품들이 우리에게 잔잔한 감흥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작가 자신의 사유와 체험이 응집된 다리의 상징체계를, 조형율의 다채로운 변주를 통해 원숙한 시적 표징의 세계로 끌어 올린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최 공 호 (美術史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