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과 인간의 교감적 지평 : 이규선 근작 도예전

 도예가 이규선이 85년에 가졌던 제 5회 개인전 이후 실로 긴 세월이 여과한 즈름 회심의 제 6회전을 갖는다. 그동안 굵직한 단체전을 통해서 줄곧 작품을 발표해 오긴 했지만 개인전을 통해서 이처럼 자신의 십년 탐색사를 선보인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실로 감회로운 것이리라.

 애초 그가 80년대에 모색했던 도자의 세계란, <土脈>과 <脈>시리즈로 압출시켜 볼 때 <흙>과 이를 통해서 환기되는 정신적 <맥락(脈絡)>에 대한 탐구로 요약될 수 있다. 우리의 전통 그릇들에서 유추해 볼 수 있는 성형과 패턴의 거칠로 미완결적인 모습에서 우리의 조상들이 동경해 마지않았던 흙에 대한 노스탈자를 엿보려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작품들의 생김새는 흡사 우리의 옛 토담집 외벽의 정돈된 구획들 아니면 자연스러운 굴곡들로 연속되는 곡면 구조의 것이거나 풍상에 닦여 절편들로 금간 표현, 구멍들, 선조(線條), 그리고 흰 반점들을 내재한 공간 구조를 하고 있었다.

 이번 출품작들은 일단 이러한 맥락을 근저에 깐 발전적인 모색의 일환으로 읽혀진다. 90년대의 <作品=人間>시리즈는 이러한 의미에서 그가 우리의 전통과 혈맥을 흙에서만 국한시키지 않고 오늘의 <人間的 地平>에 까지 접목시키려 하였다. 원래 <도예>라고 했을 때 거기에는 의례히 인간적 요소가 잠입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도예가가 도예 자체에 주목해서 인간적 혈맥을 사유하는 것과 도예의 토맥을 찾는 데 한정해서 우리의 인간 됨됨이를 의식에 두려는 것과 후자를 통해서 도자의 토맥을 음미하는데 도달하려는 것은 강조의 차이말고도 작품의 결말에 이르는 과정 또한 다를 수 있다.

 <作品=人間>연작들은 일단 도자의 '컨셉'에 있어서 작품과 인간을 별개의 양항으로 생각하면서 이 둘을 하나로 융합시키려는 방법론적 정위를 택하고 있다. 그가 어떻게 이러한 방향을 정당화하려고 했는지에 대해서 일별해 둘 필요가 있다. 우선 성형기법의 선택에 있어서 물레성형이외에 판상성형이 크게 증가했다는 점, 문양에 있어서는 색화장토와 색유(色油)의 혼합에 의한 회화적 효과가 현저해졌다는 점, 그리고 종래의 소성기법에서는 이루지 못했던 <환원소성>이 조심스럽게 원용됨으로써 산화소성 이후의 발전 가능성을 넓히기에 이르렀다는 몇가지를 들 수 있다. 이들 몇 가지 기법상의 발전과 추이가 목표로 하고자 하는 것은 그가 도자에 관한 우리의 고유한 맥락을 공예적인 것으로서보다는 순수조형적이고 정신적인 가치 내지는 규범적인 것으로 해석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뒤이어 이 해석을 조형적으로 펼치고자 함에 있어서 찾아 볼 수 있는 제 2의 특징들을 이번 출품작들의 양식적 해법에서 엿볼 수 있다. 출품작들은 주병작, 은호와 같은 전통 양식말고도 압도적인 양에 있어서 순수 조형성을 염두에 둔 작품들이 대종을 이루고 있다. 예컨대 원통을 쌓아올린다든지, 사각 입체물을 쌓는다든지, 토담을 상기시키는 형태와 안경을 놓아두기 위한 안경집이나 순수한 원통과 같은 오브제들이 기능을 탈각한 상태의 입체물 이거나 상징물을 시사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자유로운 기하학적 변형의 형태들이 작품의 전체외관을 지배하고 있고 은유와 상징적 주술성을 동반한 패턴과 구멍들하며 빗살문이 재등장함으로써 새로운 도자 의식을 궁구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이 모든 변화를 한마디로 요약하고 그 원천을 짚어 보노라면 근자의 그의 도자의식이 겨냥하고 있는 지향점은 흙과 인간을 동일 선상에서 이해하면서 이 양자간의 <교감적 지평>을 설정하려는데 있다고 믿어진다. 분명히 말해 이 점은 80년대의 그의 도자의식에서 보자면 커다란 변모라고 할 수 있다. 종래의 경우처럼 단순한 <공예적>기능 개념으로서의 흙의 맥락이 아니라 도자의 토맥을 다시 <인문주의적>맥락으로 전치시키려 했다고 할 수 있다.

 <교감적 지평>의 마련은 이점에서 하나의 새로운 도자의식의 발한으로 이해된다. 그의 근작들은 따라서 <그릇>이라기 보다는 그 이상의 정신적 ·주술적·상징적 은유로서 받아들여지고 읽히운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무언사를 손짓하며 시사를 보낸다. 혹은 천계를 향하여 솟구치는가 하면 흙내음이 이는 대지의 지평으로 침잠하는 자태를 보여 준다. 그러한 중에 주술이 숨쉬는 패턴과 구멍들과 질감들이 호흡을 일으키며 작품들로 하여금 새로운 지평에서 읽혀지도록 한다.

 그의 <작품=인간>이 함의하고 있는 명제적 의미나 지금까지 기술해본 핵심적인 내용들이 모두 그의 새로운 도자의식의 이모저모를 잘 보여 준다는 것은 실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내일을 또한 기대하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1995. 11                                 

                                                김복영(홍익대 교수·미술평론가)

작품-9501: 불꽃놀이, 37×37×131cm, 1995

작품-9502: 겨울 1, 37×37×109cm, 1995

작품-9503: 겨울 2, 37×37×113cm, 1995

작품-9504: 초가을, 37×37×131cm, 1995

작품-9505: 봄, 37×37×130cm, 1995

작품-9506: 만추, 37×37×130cm, 1995

작품-9510: 여름, 37×37×130cm, 1995

작품-9507: 가을, 37×37×132cm, 1995

작품-9508: 황금들녘, 37×37×133cm, 1995

작품-9509: 황금들녘 2, 37×37×58cm,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