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한 형태속애 깃든 성실함
이희선 작품은 고졸(古拙)하면서 동시에 새삭의 깊이를 지니고 있다. 미국에 유학하기 전 자연에서 추출한 단아하면서 생명성을 암시하는 유기적인 형태와 세련된 미감이 돋보이던 기물성향의 도예로부터 질박하지만 매우 강건한 도조(陶彫)로 변모하는데 약 십 년이 필요했던 것 같다. 우아한 곡선과 완결을 지향하는 형태가 돋보였던 십년 전의 작업과 지금의 작업을 비교해 볼 때 그 변화는 자못 큰 것이지만 이 기간이 단순히 유예가 아니라 모색과 검증의 시간이었음을 그의 작품은 증명하고 있다. 그의 작업과정을 훑어보면 이러한 변화가 급격한 단절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꾸준한 자기갱신의 결과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작업의 새로운 진로를 위해 유학했고, 그 과정에서 조각의 매스와 볼륨, 조각의 공간성과 그에게는 매우 익숙한 흙의 조각적 표현가능성을 습득했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인 변화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작업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진지한 자기확인이 이 기간동안 내내 그를 채근하고 고무시켰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는 느지막한 나이에 새롭게 다니던 미국의 미술대학에서 거의 강박적으로 '한국적인 것'을 찾았다고 한다. 그가 이 문제의 해결점을 찾은 것이 미국에서가 아니라 귀국 후 여러 지방을 여행하면서 우리나라 산천에서 발견했던 이름없는 석물(石物)이나 조형물이었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를 암시한다. 꾸임없는 수수한 형태와 인공성을 억제한 표면의 이 물건들이 긴 시간의 마모과정에 순응하며 견뎌내었을 역사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 작가로서 그가 느끼는 감흥이 남달랐을 것임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전통적인 민예품에서 받은 인상을 단순히 재현하는 것에 만족했더라면 토속적 소재주의의 한계를 결코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그것을 자기의 조형언어로 육화하기 위한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전통하면 토속성을 떠올리는 등식을 극복하여 육중한 양괴(量槐)와 명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독특한 인체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망부석이나 비석, 돌하루방과 장승의 단순하면서 응축된 형태를 암시하는 거의 작품은 여러번 불에 달궈진 유약이 흙의 표면에 녹아들며 만들어내는 균열과 함께 시간의 흐름 앞에 나약하게 부서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의해 더욱 견고해진 표지석(標識石)과도 같은 강인한 인체를 창조하게 된 것이다. 그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마케트(Maquette)이며, 마케트의 경우 손의 압력에 의해 변화무쌍한 표정을 연출하는 흙의 가소성이 충분히 드러나고 있어 큰 작품과는 달리 추상표현적, 자기발생적 상태를 보여준다.
외형적인 육중함과 강인함에 비해 내용적으로 부드럽고 온화한 생의 긍정과 관용의 정신이 돋보이는 그의 작품은 신앙 앞에 겸손한 그의 성품을 반영하고 있다. 그래서 대지 위에 직립한 이 인체들은 평원에 서있는 스톤헨지처럼 멈춰버린 시간과 그 긴 고독과 항구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한편 서로에게 어깨를 기대고 살아가야 할 인간세상의 삶의 법칙에 대해 가르치고 있는 듯하다.
그의 작품을 보았을 때 나는 단순고졸하면서 영원을 지향하는 듯한 그 형태에서 어떤 주술적인 주제를 느끼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의 작업이 기독교적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다소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작품이 지향하고 있는 보편적인 인간애가 신앙과 얼마만큼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작품은 작품 그 자체로 읽혀져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생각하게 만든다.
최태만/미술평론가
참 빛 가운데에서, 270×130×195cm, 1995
마른나무가지에서 살구꽃을 피운 여인, 55×35×163cm, 1995
베드로의 물고기, 50×23×65cm, 1995
밀알 여인, 42×38×130cm, 1995
겨자씨를 심은 여인들, 67×35×150cm, 50×333×143cm, 1995
人物 95-1, 23×18×35cm, 1995
人物 95-7, 60×45×115cm, 1995
人物 95-3, 30×18×42cm, 1995
人物 95-6, 24×18×47cm, 1995
생명나무와 아이, 46×29×48cm, 199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