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예가 정담순

 항상 옛 스러운 것에서 새로운 것으로 변모하는 과정이 짧으면 짧을수록 그 변화의 계기가 되었던 중요한 사건들은 소홀히 되기가 쉽다. 특히 변화의 폭이 아주 커서 새로움과 옛스러움 사이에 아무런 유사성을 발견할 수 없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변모의 형태를 관찰하려 든다면 각각의 과정 과정들이 눈에 띄게 될 것이며 변모에 결정적 계기를 부여했던 사건들이 하나 하나 구체적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70년대 후반부터 불과 20여년이 채 안되는 짧은 기간동안 우리의 현대도예는 내외적으로 다종다양한 면모를 보이면서 놀랄만한 규모로 확산되어 왔다. 그러나 오늘에 이러한 성황이 근대와 현대의 과정에서 얻어낸 성과들을 기반으로 하여 계승되고 계발한 결과였는가 하는 문제에 부닥치면 명백한 대답을 하기 어렵다.

 멀게는 조선시대 백자의 창조 주체인 사기장들의 건강한 도자관이 오늘날 어떤 방법으로 조화되고 있는지, 한일합방직후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던 민족자본의 형성과 민족교육의 실천방안의 일환으로 도자산업의 부흥을 꿈꾸었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가였던 남강 이승훈 선생의 실천적 이념이 계승되었는지, 또는 일제의 암흑기 동안 전통도예의 복원을 위해 헌신하였던 유명, 익명의 수많은 도예가들의 정신이 오늘에 현대도자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조차 대답하기 어렵다.

 대답이 어렵기는 오늘의 실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해방이후 민족적 수난기였던 한국동란의 겪고 척박한 실정에서 전통의 계승과 현대와의 접목을 위해 노력했던 이들, 당시 도예의 선진국에서 수업하고 새로운 형식을 제시하였던, 그리고 형식에서 탈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재료 자체가 갖는 심미적 요소를 발견하려 했던 정신은 오늘의 현대도예가 기반으로 삼고 있는지 하는 문제는 정말 대답하기 어렵다.

 근대에서 현대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정담순선생의 위치는 명백하게 나타난다. 선생은 초기 아카데미교육을 거친 현대도예 1세대에 해당된다. 그러나 당시 실용과 그릇이라는 전통적 가치관에서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물레성형과 안료로 섞은 색유(色柚)를 사용하는 도예가들과는 다르게 도예원료인 흙이 갖고 있는 본래의 의미를 찾는 작업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도예 인구도 적고 사회적 인식마저 없다시피한 당시의 실정에서 형식만 그릇의 모양을 갖고 아무런 기능이 없는 도예에 더 이상 매달릴 가치가 없다는 선생 나름의 도예관(陶藝觀)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의 작업은 형식에서 볼 때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도예의 보편적 원칙을 중요시하며 성형한 그릇의 변형과 재료가 갖는 질감을 그대로 드러내는 '70년대까지의 경향과 흙의 질감을 더욱 강조하고 물리적 성질을 응용하여 구조화시키는 '80년대 이후의 경향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인위적인 작업과정중에 흙의 질감이나 성질을 이용하여 변형시킴으로서 자연을 끌어들이려는 의도가 있는 반면, 후자는 자연과는 관계없이 제작자 개인이 쌓아 온 심미적 체험과 심상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흙이 갖는 모든 물리적 화학적 성질을 활용하려는 분명한 의도가 있다. 따라서 이 경우 규모는 작아지는 반면 구조적으로 치밀하여 사상적인 이해와 삶의 흔적, 전설과 같은 내용을 포함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제자들이 선생의 회갑을 맞이하여 작품전을 구상하고 있다느 계획을 전해들으면서 아울러 이 글을 부탁받았다. 작품에 대한 평론이나 작가론을 쓸만한 능력이 없는 글쓴이로서는 정말 감당키 어려운 일이지만 선구적인 도예가로서 정열적인 교육자로서 선생의 일면을 되새겨 보는 것에 의의를 둔다는 전제로 무딘 펜을 들었다. 선생께 누가 되지 않을까 걱정뿐이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선생으로부터 한 학기 강의를 들으면서 글쓴이의 첫 도예 수업이 시작되었다. 1971년 삼학년 일학기였다. 점토를 처음 만지는 처지에 정확한 물레성형법을 다그치던 선생의 못미더워 하던 표정은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았다. 그렇게도 정확한 물레법을 다그치던 선생의 작품이 일그러지고 찢겨져 있었던 것에서 일종의 배신감 같은 것도 받았지만 가까운 훗 날 어렴풋이나마 이해되었다고 기억된다.

 한번은 나무주걱을 써서 아주 익숙한 솜씨로 그릇을 만들어 보이면서, 일본에서 쓰는 것인데 원래는 우리의 기술이었지만 정작 우리는 쓰지 않는다는 설명을 하였다. 단절된 우리 도예의 전통을 계승하는 방법 중에 하나는 오늘날 일본도예의 생산체계와 사회에서 기능 등 몇 가지 방법을 배워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국가주의적 분위기에 젖어 있던 '70년대의 학도들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었다. 글쓴이도 도자사 공부를 시작하고 난 후 근대도자에 대한 선생의 논문을 읽고 나서 비로소 나무주걱이 주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아주 최근에 몇몇 제자들과 선생이 함께 한 자리에서 오간 몇 마디가 기억난다. 선생은 요즘 대학에서나 젊은 예비도예인들이 물레에 관심이 없다는 말과 함께 도예의 시작이자 끝은 오로지 물레라고 하면서, 전통적인 것, 기능적인 것, 조형적인 것, 또는 산업의 관점에서 보는 것 등 여러 가지 방향의 가능성을 고루 교육시키고 또 수련해야만 안정된 도예인으로서 기반이 된다는 내용을 덧붙였다. 듣고 있던 한 이가 그 원인은 40대에 중진 도예가 모두 조형작품을 하고 또 그들이 현대도예 교육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라 하며 그 중진들이 대부분 선생의 제자가 아니냐 하며 웃었다. 선생은 마치 변명을 하듯 기능이 없고 모양만 그릇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당시(70년대)에 새로운 성형방법으로 보여준 것이지 그 방법만이 전부라고 하지 않았다 하며 오래 전에 물레를 다그치며 못미더워하던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선생의 강의로부터 도예에 입문하였던 십 수명의 중진 도예가들이 이러한 회갑기념작품전을 구상하고 또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지 근 이년이 지났다. 또 몇분은 오랜 동안 꾸준히 계획하고 점검하는 힘든 일을 맡아 주셨다. 은사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끊임없이 외형을 바꾸면서 유행에 따라 획일화되어 가고 있는 데에 급급한 듯 보이는 우리 현대도자의 흐름에 창조적 원동력을 자아의 발견에서부터 끌어내고 있는 선생의 작품이 새로운 전환의 계기로서 작용할 수 있다고 믿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병탁 관장의 섬세한 배려 역시 선생의 작품전에 큰 힘이 되었다. 선생이 현대도자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처럼 우관장은 '80년대 이후 전개와 확산의 과정에서 궂은 일을 마다 않았다, 그리고 사진작가 한석홍씨는 고려시대의 청자와 조선시대의 분청과 백자를 촬영하는 감동으로 선생의 작품을 정성스럽게 담아 주었다.

 여기 출품된 작품들이 삼십여년전 선생의 작품이 당시 한국도예의 새로운 전환의 계기가 되었던 것과 같이 오늘날 내일의 도예를 위한 또 하나의 계기로 작용하고 또 활용되기 바라는 마음이다.

최건/해강도자미술관

450×210×180mm, 1994

380×100×120mm, 1994

320×340×90mm, 1994

160×255×170mm, 1994

140×100×140mm, 1994

180×180×210mm, 1994

190×130×300mm, 1994

70×40×110mm, 1994

360×270mm, 1994

360×270mm,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