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적 체험의 읽기로서 刻字

강선학 (미술평론가)     

  김길권의 작업은 문자 체험을 다시 형상이라는 구체성으로 퇴행시켜 문자와 사물간의 접점으로 우리를 이끈다.

  도편에 새겨진 전자(篆字)의 형상들은 일반인들이 읽어서 이해되는 의미의 세계도, 사물을 형용한 묘사의 세계도 아닌 상태로 우리에게 내 놓여 있다. 그의 작품의 외형이 원이든 네모이든, 기의 형태를 갖든 탈기(脫器)의 형태이든, 유약을 입힌 것이든 무유의 상태이든 어떤 형상을 하든 그것을 능가하는 형상적 특징은 해독하기 힘든 문자형상들이다. 문자 형상이라 하는 것은 문자로서 해독성(解讀性)이 없기 때문에 형상이라는 말을 덧붙인 것이지만 그의 작품을 읽어내는데 중요한 특징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기형의 공간을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게 와 닿는 문자형상들은 전자체(篆字體)에 익숙한 사람들을 위한 서예법본이나 고자(古字)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면 그것은 해독 불가능의 상황을 전제한 것이다. 해독을 전제하지 않은 문자는 이미 문자로서 기능 밖의 의도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회화성으로 읽기도 만만찮다. 해독이 불가능해도 문자라는 사실이 원체 명확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어귀에서 그의 작품의 난해성과 독자성을 만난다.

  그의 작업에서 해독 불가능의 이 문자들은 무엇을 의미하며, 무엇을 체험하게 하는 것일까. 전자(篆字)나 갑골문자(甲骨文字)는 문자로서 기능을 분명 갖는 것이지만 현대의 우리에게 문자라기보다 문자적 체험에 가까울 뿐이다. 사물이 문자라는 체계로 구획되거나 갇히기 이전의 사물인식을 만나게 한다. 사물이 문자라는 개념으로 떨어져 나오려는 그 접점에서 사물의 체험을 내재화하려는, 세계현상에 대한 자신의 내적 체험을 인식하려는 욕구를 만나게 된다. 그것은 사물과 개념이 미분화된 세계의 제의적(祭儀的) 체험이기도 하다. 다양한 세계의 현상에 대한 이해의 질서로서 고대문자는 세계의 내적 읽기라는 고대적 체험과 다르지 않다.

  흙이라는 소재의 친근성과 성형의 자유로움에 깃 든 삶의 내적 리듬감, 그릇이라는 형태성과 흙이라는 무정형성, 그 위에 가마와 불이라는 요인에 의한 성형의 고착화라는 순화의 단계로 나다나는 그의 도자작업은 마치 무정형의 사물형상이 문자라는 형태로 개념화되는 과정을 엿보게 한다. 흙의 자유로움과 성형에 의한 고착화는 무정형의 사물세계를 정형화시키는 작업과정과 유사하며, 그 과정에서 흙의 무한한 내재적 힘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전자(篆字)에의 경도는 도편(陶片)을 굽는 과정에서 생기는 파자(破子)의 형상성에서 고대 수갑귀골(獸甲龜骨)의 파형(破形)에서 생기는 흔적을 문자적 의미로 읽어내는 고대인의 체험을, 그 제의적 체험을 일깨워준다.

  무한히 열려있는 세계의 현상에서 문자는 자기인식의 분명함이자 세계에 대한 이해의 한계이기도 하다. 살아있는 가변의 세계의 개념화된 질서의 틀을 보이는 것이다. 토기편에 새기는 각자(刻字)의 형상화는 바위나 나무, 동굴별에 새기는 원초적인 형상의 욕구이자 제의적인 기원성을 갖는다. 그것은 고대적 체험을 재현하고 사물과 문자 사이를 매개하는 역할을 한다. 울타리 속에 야생 짐승을 가두어 가축으로 순화하듯, 책(冊)이라는 울타리 속에 가두어진 형상들이 순화되어 문자가 되듯 그의 작업은 문자에 익숙한, 개념에 갇힌 현대인을 형상과 무정형의 세계로 다시 이끌어 내고 있다. 전자(篆字)라는 불가해(不可解)의 문자 체험은 문자라는 분명하고 구획된 인식의 세계와 사물이라는 혹은 세계라는 무한정의 세계 사이에 놓여진 우리의식의 원초적 지평을 내다보게 한다. 그것이 그의 작업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독자성이자 의미가 아닐까.

원시-회귀-질서

물고기가 있는 항아리 410×360

설화 720×430

원시-가을 400×400

십삼월 420×100×200

원시- 회귀2  430×130×300

원시- 회귀1  540×100×360

원시- 회귀3  460×100×3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