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의 상상력- 우주, 자연, 인간과의 조화

 인간은 누구나 어떤 틀 속에서 규제되거나 속박되는 것을 싫어한다. 특히 창작을 하는 작가들에게 있어 그들의 의식이나 사고는 더욱 그러할 것이며 표현되는 조형세계는 새로운 질서와 형식, 나아가 어법의 독창성을 갈망하게 되고 이를 위해 많은 실험과 탐색의 노력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를 다루는 재료에 대한 해석과 선택이 선행되며 또한 총체적으로 조형화하기 위한 도입과 적용은 더욱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이러한 서두는 작가 안시헌이 보여주고자 하는 네 번째 개인전 - "기원으로부터" 가 그의 일관된 주제권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조형성과를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안시헌의 근작들은 우리에게, 특히 도예를 하는 많은 작가들에게 신선한 충격과 자유로운 상상력을 증폭시켜주고 있다.

 이같은 현상은 그의 선택적 기로에서 연유한 것인가, 현실적 대답인가, 아니면 조형적 탐색인가 하고 조심스러운 질문을 던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답은 안시헌의 삶의 족적과 동질한 선상에서 추적하고 접근해봐야 할 것이다. 내가 안시헌을 만난 것은 10여년 전으로 기억하며 홍익공전(5년제) 공예과를 졸업한 후 모교에서 조교로 재직하면서 서울산업대학교에 진학한 때였다. 그때 이미 그는 조각에 입문하여 조각가 김영중선생에게 사사받았으며, 제3회 중앙미술대전 조각부분에도 목조 작품을 출품하였다. 이 무렵의 그의 작업은 주로 철조, 브론즈를 위주로 도자, 목조, 석조 등 풍부한 재료적 경험을 쌓는 계기를 이루고 있었다. 그가 작업을 통해 수학하고 터득했던 공예의 재료적 다양성과 도예의 전문성은 그의 작가로서의 소중한 경험이 되었으나 그를 충동질하고 있는 의식의 저변에는 보다 체계적인 조형세계로의 접근이 요구되었고 의식의 확장이라고 할까, 표현의 자유가 절실해져 있었다.

 '86년에 금속공예가인 경명옥과 결혼 후 곧바로 이태리 밀라노 국립미술대학의 문을 두드려 안드레아 까셀라 교수로부터 본격적인 조각수업에 돌입하였다. 그의 노력과 열정은 졸업과 동시에 첫 개인전을, 그리고 '92년에 밀라노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가지게 되었다. 까라라에서의 작가 활동을 가진 후 약 7년간의 유학생활을 마감하고 귀국했으며 귀국전에서 선보인 석조작품들은 그의 열린 시각과 폭넓은 조형세계를 참신하고 대범하게 펼쳐 보여 주었다. 이후 안시헌은 과거에 경험했던 재료들을 다양하게 구사함으로써 그가 중견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그의 상상력과 조형언어를 구축하는 매재적 효과에 큰 몫을 하였으며 그의 조형세계를 더욱 풍요롭게 해주고 있음을 보게 된다. 또한 이번 네 번째 전시는 이러한 경험을 확인하는 기회로서 흙의 특성을 강조하고 나무와의 재료적 조화가 의도된 또한 구조적 계산을 전제한 작품 20여점을 선보이고자 한다.

 안시헌의 신작에서 조형적 기조를 이루고 있는 것은 반구형의 Raku에 의한 점토형상과 입방체의 구조적 특성을 가세하여 접목한 목재의 강직한 형상들이다. 반구 형태는 자연생성물의 기본 요소중 하나인 흙을 통한 모성적인 의미와 우주의 한 부분인 대지가 갖고 있는 포용성을 나타내며 때로는 해와 달, 별 등의 행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입방체의 목재는 남성적이며 인위적 형상으로 반구형을 적극 수용하는 자연스러운 융합을 나타내 보이고 있으며, 제작 방법에서는 Raku소성에 의한 소지의 물성과 금속성을 통해 대지를 상징케 하고 있다. 또한 입방체인 목재의 결을 표출함으로써 두 재료의 특성을 확연하게 드러내보여 전체적인 형상과 색채는 융합과 조화를 이루게 하였다. 이와 같이 조형작업에 도입된 재료인 흙과 나무는 인간과 가장 가까운 물질로서, 인간의 삶과 죽음이 하나로 결합된 동양적 사상과 일체됨을 보이며 나아가 우주의 생성기원과 원리를 짐작케하고 있음은 작가 자신의 심오한 조형철학으로 풀이된다.

 작가 안시헌은 재료에 대한 경험을 그의 작업에 적절히 이입시키고 있다. 그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실험정신과 진솔한 자세는 또 다른 시각에서 흙을 통한 새로운 조형적 탐색이 되며 현대도예에 대한 제안적 표현으로도 해석된다. 그의 창작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뜨거운 열정은 오늘의 작가들 모두에게 또 하나의 표상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1997. 4 서울산업대학교 교수      

                  도예가 韓 吉 弘      

"기원으로부터" 에 대하여

                                      최 태 만 / 미술평론가   

 유스티니아누스가 지배하던 비잔틴 제국시대에 건축된 하기아 소피아 성당의 쿠폴라(Cupola)는 '찬연히 빛나는 천상의 세계와도 같은' 시각적, 심리적 효과를 보여주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건축물의 본체위에 돔(Dome)을 얹는 방식은 로마시대의 범신적인 판테온에 이미 나타나고 있으나, 기념비적인 규모로 건축된 둥근 천장이 있는 하기아 소피아 성당의 실내로 들어가면 마치 우주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듯한 무한성과 중량감을 초월한 진공공간에 서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만든다고 한다. 하늘로부터 전달되는 신의 계시를 받아들이기 위해 한껏 에너지를 집중시키려는 듯 팽창해 있는 반구형(半球形)의 천장은 인간이 지각할 수 있는 천개(天蓋)에 대한 완벽한 상징을 보여준다. 사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하기 전에 그리스 헬레니즘시기의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수립된 천체관 즉, 지구는 평편하기 때문에 그 끝으로 계속가면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반면 우주는 둥근 반구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반구의 동쪽에서 뜬 해가 서쪽으로 진다는 천동설이 지배적이었다. 코페르니쿠스와 케플러, 갈릴레오 등에 의해 이 천동설이 허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나, 천동설은 지구를 우주의 중심으로 파악하는 인간중심적 세계관의 기초가 되었다. 지구가 구형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깨닫기 이전에도 사람들은 천체를 둥근 것으로 인식한 흔적을 르네상스 운동이 유럽으로 확산되던 시기에 여전히 중세적 세계관이 입각하여 천국과 지옥의 모습을 그렸던 히에로니무스 보슈(Hieronymus Bosch)의 <쾌락의 동산>이란 작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삼면화(Triptych)의 양쪽 날개 부분을 닫으면, 그 뒷면에 구슬처럼 빛나는 입체경 속에 천지창조의 정경을 그려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구형은 우주에 대한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대표적인 기하학적 도형인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례를 찾을 수 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세종대왕의 독창적인 발명품으로 알려진 앙부일귀 (仰斧日晷)는 구형의 천체를 절단해 놓은 듯한 형태의 가장자리에 그림자의 방향에 따라 이른바 시각을 알려주는 영침(影針)을 설계해 놓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세잔(Paul Cezanne)은 모든 대상을 구와 원뿔, 원통으로 환원하라고 말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사실 구형(球形)이야말로 더 이상 환원할 수 없는 가장 완벽하고 절대적인 기하학적 형태일 뿐만 아니라 거의 우주론적이라 할 만한 완전한 비례와 논리적인 형태의 견고성, 영원성을 품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예술가들은 구형을 통해 순환하는 자연의 질서와 충만한 공간을 표현하고자 했는지 모른다. 나아가 구의 평면적도형인 원은 동양의 정신세계에서 중요한 삶과 죽음의 순환과정, 풍만과 공허, 존재와 무, 융측된 에너지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듯 구는 우주의 본체에 대한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함과 아울러 모든 자연물의 생성과 소멸의 순환과정을 암시하는 형태라고 할 수 있는데 안시헌의 작품을 보면 지구나 혹은 다른 행성을 연상하게 만드는 반구형이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하고 있다. 게다가 흙을 빚어 만들어 놓은 그 표면은 지각변동이 일어난 행성의 표피처럼 거칠고 투박할 뿐만 아니라 절단된 반구가 하기아 소피아 성당의 쿠폴라나 앙부일귀의 형태를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에 그의 작업이 우주론적 입장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자 중의 한 사람이자 변증법적 방법을 개척했던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의 근본적인 실체인 아르케(Arche)를 '물'이라고 상정한 탈레스의 논리를 발전시켜 만물의 근원을 '불'이라고 주장하며, '흙이 소멸하여 불이 되고, 불이 소멸하여 공기가 되며, 공기가 소멸하여 물이 되고, 물이 소멸하여 다시 흙이 된다.' 는 만물 유전(流轉)의 법칙에 대해 말한 바 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이러한 논리는 흙을 빚어 형태를 만들고 건조시킨 다음 불에 구워낸 후 유약을 바르고 그것을 다시 굽는 안시헌의 작업과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즉 그의 구는 생명을 잉태하는 대지에 떠올리게 만듦은 물론 그것을 풍요하게 만드는 촉촉함과 건조와 소성 뒤의 견고함을 바탕으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흙, 물, 불, 공기란 사원소적 속성을 충족시킨다.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보더라도 우리는 모두 흙의 자손이지 않은가? 그의 작품에 일관되게 적용된 <기원으로부터> 란 주제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물질로 구체화된 형태에서 우주는 물론 생명의 근원과 그 신비를 천착하고 있는 것이다. 크게 우주의 무한성으로부터 작게 생명의 원형(原型)을 떠올리게 만드는 이 반구는 표면을 암갈색으로 태운 나무로 구성된 사면체의 지지대와 결합되어 형태적 소화를 추구하는가 하면 반구속으로 파고든 사각기둥에 의해 시각적 긴장감을 유발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질박한 반구의 표면과 검게 그을은 나무 입방체는 서로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더욱 구축적인 구조로 발전시키고 있다. 그것은 토템이나 기념비, 혹은 신전의 한 부분처럼 보이는가 하면, 우주의 생성과 순환의 원리를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형태를 통해 상상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반구의 네 방향으로부터 형성된 계단이 직각으로 상승하는 입방체와 결합하여 지구의 중심으로부터 형성된 에너지가 지표면을 거쳐 우주를 향해 상승하는 듯한 시각적 효과를 거둠으로써 힘의 수렴과 융축을 통한 초월에의 의지를 드러내기도 한다. 네 방위(方位)는 수평적 공간을 암시한다면 그 중심부에서 솟아오른 입방체는 수직공간을 상징한다. 수직입방체의 표면에 새겨진 아치형의 문은 마치 좌표상의 포물선처럼 상승, 하강하는 에너지의 통로이자 무한공간으로 나아가는 출구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은 기하학적 입방체로 구성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단순, 건조하며 몰개성적인 미니멀리즘의 '대상으로부터의 거리두기' 와는 다른 차원에서 재료속으로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세계관을 투사(投射)하고자 한 의지의 반영물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 속에 작가의 손길의 흔적을 지워내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부각시킨 태도에서도 그러하지만, 가능한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모든 공정을 수공으로 진행하는 자세에서도 이러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그래서 흙으로 만들어진 반구는 대지의 수용적이며 생산적인 의미를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천체운행의 원리에 대한 동경(憧暻)을 표상한 것이라면 나무의 입방체는 성장과 남성적 강건함, 자연과 투쟁하며 그것을 극복해온 인간의 문명에 대해 암시한다. 그러나 이 두 요소는 단절과 대립을 지양하고 서로 통일과 조화를 지향한다. 이런 점은 서로 이질적인 재료를 유사한 색조로 합일시킨 방법에서나 둥근 것과 직각적인 것이 상층하지 않고 안정적으로 결합된 구조에서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다. 마치 하기아 소피아 성당이 바실리카의 입방체적 구조의 아름다움을 흩뜨리지 않는 상태에서 하늘을 향해 봉긋하게 솟아있는 돔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조화와 질서는 그의 작업에 중요한 조형원리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별중에서 하나가 (One in Star) 조합토, 나무, 460×360×660㎜ 1997

성소Ⅱ (The holy placeⅡ) 조합토, 나무, 590×455×640㎜ 1997

기원의 비밀 (Secret of origin) 조합토, 315×180×630㎜ 1997

그날 이후 (After Same Day) 조합토, 나무, 585×370×680㎜ 1997

은하계 (The Galactic System) 조합토, 나무, 황동, 35×35×46㎜ 1997

일출 (Sunrise) 조합토, 나무 780×470×440㎜ 1997

세계의 반 우주 (Three half cosmos) 조합토, 나무, 670×365×750㎜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