陶藝人의 시각으로 본 삶의 존재론-잉태와 생성

최병식/미술평론가, 경희대 교수

곤지암의 작업실을 찾은 것은 어스름한 저녁 무렵이었다. 울타리도 없는 조그마한 개울물이 내려오는 숲속의 한편에 작업실과 주거공간이 함께 마련되어 있었다. 근무하는 학교도 40여분 거리이니 본인은 그렇다 하더라도 아이들이 어떻게 학교를 다니는지, 식구들은 산간의 생활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였다. 이윽고 알 수 없는 향긋한 차 한잔의 내음에서 무엇인가 알 듯 말 듯한 실마리가 맴돌았다.

작업실에 들러 전시 예정작품을 보고 나서 통 유리가 잇는 거실에 들어서니 한 50호 정도나 되었을까, 유난히 눈에 띄는 그림 한 장이 걸려 있었다. 흑청색 실루엣으로 약동감있게 표현된 한 쌍의 말 그림이었다. "무슨 뜻이 있는 겁니까?" "제 아들이 쌍둥이라서 기념으로 친구가 그려 준 것입니다." 쌍둥이라? 그리고 그들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그린 한폭의 그림을 그린다... 또다시 조금전 작업실에서 보았던 그의 작품세계와 오버랩 되어 실마리를 찾아 갈 듯하였다. 조그맣게 만들어 놓은 초가지붕 오두막이며 바위 단면을 잘라서 테이블로 쓰고 있는 밤의 이헌국 작업실은 밤늦도록 작업과 삶의 소재를 논하면서 한 도예가 이기 이전에 평범한 자연인으로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그의 관조적인 일면을 엿볼 수 있는 기회였고 작업세계의 한 단초를 열어보는 좋은 기회였다.

최근 이헌국의 작업은 모두가 잉태와 생성시리즈로 집합되어 있다. 이 시리즈는 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었던 시리즈로서 80년대의 분할과 재구성으로 도자의 원형을 깨뜨려가는 작업과 맞물려 있다.「잉태3-6」은 당시 비교적 단순하지만 최근의 작업 초기 단계로서 규정 할 수 있는 생명의 탄생을 의미하고 있으며 80년대의 「律」이나 「대화」시리즈에서 연속되는 형상이 이어지지만 「잉태의 조화」에서는 전통적인 도자의 곡선에서 파편처럼 단면으로 팽창하고 수축되어 가는 긴장감을 부여함으로서 새 생명을 잉태하는 조화율을 구사하고 있다. "도자를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쯤 갖는 의문이지만 도자기의 속을 들여다보고 싶은 충동이 자연적으로 일게됩니다." 그래서 그 껍질을 벗겨보는 심정으로 잉태의 조화를 만들어내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생명의 탄생은 남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는 그의 개인적인 성장배경에서 비롯된 연유가 가장 크다 하겠지만 뒤늦게 혼인을 하게 되고 간절히 자식의 잉태를 기원했다가 쌍둥이 아들을 낳게된 것도 그 자신이 체현한 삶의 한 소재로서 작용한 이유가 될 수 있다. 90년대부터 잉태시리즈가 이어진 것과 같은 해에 그들이 태어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연결관계를 맺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둘째는 무엇보다도 그의 인생관이 갖는 넉넉한 본성적인 관류에서 비롯되는 요인을 빼놓을 수 없다. 앞마당에 약간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초가오두막에서도 그의 자화상을 보는 듯 항U지만 도회보다는 자연의 흙이 그리워 아파트를 처분하고 시골 한구석에서 식구들과 함께 삶을 꾸려 가는 그의 지연 귀일적인 자세에서 연유된다.

셋째는 도예가적인 시각이기는 하지만 그가 목격해온 도요지에서 옛 선조들의 수많은 도자편들을 만져 보면서 젖어오는 傳承의 개념에 대한 단상을 들 수 있다.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시간적인 계승을 의미하는 잉태로서 옛 陶人들을 기리는 메타포가 숨쉬고 있다는 뜻이다. 이번 현대갤러리 전은 위와 같은 일련의 의미를 수년간 고뇌하면서 제작해 온 30여 점이 선보이고 있는데 그 대체적인 부류는 크게 세가지로 나뉘어 진다.

하나는 「잉태와 생성1-10」의 시리즈로서 비교적 간결한 형태를 취하고 있으면서 옛 토기의 흙 맛을 구현한 경우이다. 특히 3,4 는 초벌구이의 색감을 크게 거스르지 않고 전통자기의 곡선미를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여타의 작품들과 다르게 漢字의 도입이 없는 비교적 초기의 작품들로 구분된다.

둘째는 10-25의 경우로 재벌에서 유약의 색채가 경미하게 가미되어 여러 도자가 아래의 도자원형에서 생성되어진 것처럼 구성되었고 도자의 끝부분은 가슴의 유두와 같은 형태로 매듭지어 졌다. 그것은 아마도 여성의 유두가 갖는 새 생명에 대한 전승의 개념을 의미하고 있는 듯하며 대표작이라고 할만한 18은 하나의 칸타타처럼 가장 복합적인 구조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셋째로는 비교적 강렬한 색채가 재벌단계에 가미되어진 경우라 하겠다. 이 두 경우는 대다수가 옛 선인들의 현판 서찰 등에서 수집된 한자들을 집자하여 채색 문으로 상감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작가는 이를 한국인화 하기 위한 형식의 일환이라고 말하고 있다.

넷째는 34로서 위의 작품들과는 색다른 형식을 띄고 있다. 아예 물레를 차면서부터 일그러진 상태로 태어난 도자들이 사각의 형태에 무작위로 샇아 올려지고 있는 이 작품은 많은 옛 陶유적지에서 보았던 발굴당시의 인상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되며 일견에서도 위의 시리즈와 연결되어 시간의 흔적을 남기고 쌓여져 가는 생성의 과정을 은유하고 있다고도 말 할 수 있다. 마틴 부버Martin Buber는 작가의 시각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작품이라 했다. 이헌국의 삶과 생활 역시 거실에 거린 그 두 마리의 말 그림으로부터 「잉태와 생성」으로 이어지기까지 작품으로 이어지는 관류가 흐르고 있으며 자연으로의 회귀를 구가하는 심성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현대도예에 있어서 고대의 실용단계를 벗어나 관념적인 미감에서 비롯된 고도의 추상적 선율과 조화를 추구한 경향에서 다시금 보다 현상적이며 존재론적인 단계에까지 구체적인 소재를 구현하려는 경향이 대두되고 있음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그러나 진정한 계승은 전통의 파괴에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파괴를 동반하는 현대도자의 좌표나 그 정체성이 과연 어느 정도의 명암과 평가개념을 지니고 있는지는 아직도 신중한 성찰과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이헌국의 새로운 반란과 작업의지의 구현 역시 이와 같은 논제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

더욱이 실용미술의 단계를 초극하여 추종을 불허하는 순수미술의 극치를 구가하였던 우리 선조들의 도예문화를 상기한다면 과연 오늘날의 순수 미술적 위상을 동반한 도예미술의 위상이 어떻게 점검되어야 하느냐는 문제는 한국도예의 극히 본질적인 논의가 아닐 구 없다. 기존의 도자형태를 깨트려가면서 복합적인 공간개념을 도입한 이헌국의 공간적 도예의 의미나 색다른 의미에서 문자를 도입한 또 하나의 감각 등이 어떻게 진전되고 변신을 거듭해갈지는 그의 나이나 교육자적인 위치로 볼 때 곧바로 한국 현대도예의 현상이 갖는 본질적인 논의와 맞물려서 해석될 수 있는 한 가닥의 과제요, 가변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평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