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접시

접시들 순수조형이 극치인 원의 정교한 형태 위에 소박하고도 고졸한 들꽃과 물고기. 연꽃, 나무, 잎사귀 등의 자연스러운 드로잉이 펼쳐진 접시들의 담백한 서정성, 거기에 어우러지는 반월토, 청토, 백토, 청자토, 잡토 등의 질료의 표정과 물토, 투명유, 백유, 분청재유 등의 유약 위에 화장토나 청자유, 철화, 진사, 박지 등의 발색과 기법으로 처리된 질감과 색감은 고즈넉하고도 여유롭고, 그러면서도 여성적인 섬세함을 자아내 준다.

도예, 그 중에서도 전통적인 용기의 개념을 가장 미니멀하게 드러내는 것이 접시라고 한다면 사실 우리 나라 전통청자나 분청, 그리고 백자 접시처럼 가장 최소한의 형태감으로 단순 명쾌한 미학을 드러내 주는 용기는 세계에서도 그리 흔하지 않다. 그러나 아무리 그 형태의 단순성과 조형적인 완벽성을 가진 접시라 하더라도 거기에 어울리는 문양이나 도화(陶畵)가 시원찮다면 그것은 어떤 품격을 느끼기에는 충분치 않다. 접시의 기능성과 형태감에 덧 붙여서 바로 수준 높은 그림의 미학적인 품위가 조화롭게 어울려야 감상의 대상으로서의 도예작품이 된다는 뜻이다.

명지혜의 접시작업은 거기에 걸 맞는 맛과 멋을 갖고 있는 듯하다. 물레성형의 기술이나 손맛도 일정수준을 넘지만 접시 위에 무작위 적으로 그린 드로잉들은 과거 사대부들이 즐기던 바, 일종의 관조적인 공간을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 그 그림들의 소재는 화려하거나 장식적인 것들이 아니라 절제된 색과 선으로 이우어져서 '빔(空)에 대한 관념과 사색을 불러 일으킨다. 하긴 접시는 항아리나 그릇들에 비해 절대적으로 열려있고 비어있는 공간을 갖는다. 그 형태 뿐 아니라 무언가를 담는다는 개념의 내부공간이 제거된 상태는 마치 벌거벗은 것처럼 자유로움과 부담감을 동시에 우리에게 제공한다. 따라서 그 접시를 통해 작가는, 그리고 관객인 우리는 거짓없이 정직하게 서로의 마음과 정서를 교류하고 소통한다. 전통도예의 형식과 기법의 바탕 위에서 명지혜가 드러내는 자아는 바로 그 형식과 기법보다는 비어있는 세계에 대한 사유나 감성이다. 온존한 자기만의 세계이자 동시에 타인들과의 만남의 공간으로서의 공간이자 입체다. 전토은 단순히 그 형식만이 답습될 때는 가치 있는 것이 아니다. 철학적 요소와 미감이 승계되고 거기에서 오늘의 우리 삶과 혼연일체가 될 수 있는 당대성이 표출되어야 그 가치가 확대된다. 명지혜의 접시도 이런 여러 가지의 맥락을 두루 고민한 흔적을 갖고 있다. 상품미학의 시대에 백화점의 귀금속이나 화장품처럼 가볍고 세련된 날렵함을 담기도 하고 거부하기도 한다. 그림의 졸박한 품위에 비해 형태가 너무나 견고한 우너을 구성하고 잇는 점에서도 그렇고 자신의 내면풍경과도 같은 나무나 들꽃과 같은 소재가 전통 도예에서 관념적으로 자주 등장하던 소재인 물고기 등과 함께 등장하는 점이 그렇다. 즉 어떤 부분은 전적인 자각으로 작품을 완성하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단순히 전통적인 습관들을 차용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전통적인 습관을 차용하는 부분은 그리 큰 흠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림과 접시가 만나는 지점에서 그것이 큰 어긋남을 보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최근의 우리나라 도예는 한동안 유행하던 타 장르와의 넘나듦보다는 보다 도예자체의 문제로 회귀하는 경향이 있는 듯 하다. 즉 조형적인 발상이나 작가자신의 미술이념의 자유보다는 전통적인 도예개념의 재확인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다시 확인하려는 자세를 보이는 것이다. 그것은 전통과의 연계가 상당부분 유실된 근.현대도예사에 대해서 보다 깊이 있는 성찰을 하려는 자세로 읽혀진다. 21세기가 시작되는 지금. 이러한 한국도예의 큰흐름에서 불혹의 나이에 첫 전시를 갖는 명지혜에게 요구되는 점이 있다면 바로 이 흐름을 예의 주시함며 전통과 현대와 자기작업에 대한 끊임없는 반성과 사유다. 아무리 추상적인 조형성을 찾는 그릇작업이라고 해도 거기에는 분명히 자아와 작업이념과 당새성이 반영되기 때문이다. 작업은 가장 내밀한 작가 개인으로부터 출발하지만 그 바탕에는 전통과 동시대의 환경이 있고 그것이 다시 사회로 확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예개념과 전통과 현대성에 대한 역사적 사회학적 접근과 도예 형식과 미학에 대한 폭넓은 통일을 통하여 보다 진전된 작업을 지속하고 보여주길 바란다.

김진하 / 전시기획가



지혜접시 Ø8.3×1.5cm(실제크기) 2000

추억 Ø37×cm 2000

지혜접시 Ø23.3×4.3cm 2000 INSTALLATION

지혜접시 Ø40×8cm 2000

지혜접시 Ø17×3.5cm 2000

지혜접시 Ø24×4cm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