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신비를 담아낸 도자예술

인간이 생활집기를 처음 만든 것은 흙을 통해서였다. 곡식을 담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진 흙 그릇이 최초의 생활집기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인간은 단지 곡식과 음식을 담기 위한 기능적인 측면에 그치지 않고 그 형태적인 아름다움에 관심을 갖기 시작 했다. 그릇의 형태를 다양하게 만드는 과정을 통해 아름다움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도예라는 용어는 바로 그릇을 예술의 차원으로 끌어올린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그러나 도예라는 용어가 있기 전에도 그릇은 이미 예술품이었다. 20세기에 이르러 도예는 이제 스스로 새로운 자기혁신을 모색하게 된다. 그릇이 가지고 있는 한정된 공간, 즉 생활용기에서 벗어나 보다 예술성이 강조되는 소조의 개념을 도입하게 된다. 그릇의 개념을 가지면서도 조형적인 아름다움이 보다 더 강조되는 형태로 영역을 확장하게 된 것이다. ‘도조’라는 용어가 쓰이게 된 데서 알 수 있듯이 그릇으로서의 공간을 박차고 나와 거의 소조에 육박하는 조형성을 추구하고 있다. 이린도 그릇과 조각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며 작업하고 있다. 적어도 형태적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그릇이라고 하기에는 조형적으로 조각에 훨씬 가까운 작업을 해왔다. 용도 그 자체보다는 외형적인 아름다움과 내용으로서의 메시지를 우선하는 작업에 심취해온 것이다. 인물이 제재로 등장하는 많은 작업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데 따른 필연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그 자신으로 하여금 형태 및 내용에 관심을 갖게 한 직접적인 요인은 흙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형태적인 변주의 가능성이었다. 따라서 그가 형태미에 우선하는 다양한 도조 작업을 한 것은 무엇이든지 만들 수 있다는 흙의 쓰임새에 대한 지적인 탐구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본질적으로 도자기의 개념을 중심에 두고 있다. 물론 ‘벽걸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작업은 그릇의 개념으로부터 완전히 떠나 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의 작가적인 모습은 여전히 그릇의 형태에 머물러 있다. 그릇의 개념에 기반을 두고서 보다 깊고 넓고 높은 세계로 그 형태 및 거기에 담기는 내용을 확산시켜 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그릇의 개념이 약화되면서 무엇을 나타낼 것인가, 하는 표현의 문제로 작가적인 관심이 자연스럽게 이동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무엇’은 내용으로서의 사상이나 철학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릇이라는 용도, 즉 기능성이 강조되는 형태에서는 사상을 구체화하는데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그릇으로서의 용도를 약화시킴으로써 형태의 변이가 가능하고 형태를 통해 사상 및 철학을 담을 수 있는 것이다. 현대 도예는 기능성과 더불어 예술성 그리고 사회적인 메시지에 이르기까지 그 표현영역을 넓히고 있다. 사회적인 메시지는 그 자신의 인생관 및 예술관과 관련된 내용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릇이라는 전통적이고 소극적인 의미에 한정하지 않고 작가 자신의 의식을 담는 그릇으로서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작업은 이렇듯 현대도예의 개념에 충실하고자 한다. 그래서 속이 비어 있다는, 즉 무엇을 담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항상 열어놓은 채 메시지를 담는 일에 비중을 높이고 있다. 그가 작업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 즉 메시지는 생명의 신비를 그릇의 형태 속에서 구체적으로 시각화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생명의 현상을 그릇의 형태 속에 표현하려는데 있다. 생명의 여러 형태 중에서 인간의 생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인간의 신체적인 아름다움과 도자기의 형태적인 아름다움을 일치시킬 수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도자기의 둥근 형태는 만드는 과정에서 요구되는 기술적인 문제와 관련이 있겠지만 그 외적인 형태미라는 측면에서 보면 인체와 아주 유사하다. 물론 자연물상 가운데서도 과일 따위의 형태는 도자기의 둥근 곡선과 연관성을 가진다. 하지만 종합적으로 판단한 때 도자기는 여체와 아주 가까운 모양을 하고 있다. 이는 우연의 결과라기보다는 인체의 형태미에 그만큼 익숙해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래서일까. 그 역시 그릇의 형태미는 대부분 의도적으로 여체의 이미지에 접근시킨다. 펑퍼짐하고 탄력적인 형태의 항아리는 여체의 둔부를 연상시킨다. 실제로 그는 항아리를 빚을 때 여체의 둔부를 의식하며 제작하고 있다. 여체의 둔부는 바로 생명의 집을 상징하는 까닭이다. 따라서 여체의 둔부가 가지고 있는 생명의 에너지를 강조하기 위해 부풀리는 기법으로 양감을 과장하기도 하다. 이때 둔부의 이미지를 강조하는데 따른 부풀리는 형태는 탄력과 더불어 충만한 생동감 및 생명감을 암시한다. 이처럼 그릇의 내부로부터 차 오르는 듯한 팽팽한 탄력은 시각적인 김장감을 높이면서 움트는 생명력을 시사한다. 그는 이처럼 터져 오르는 듯한 양감을 통해 그릇에 유연성을 부여한다. 유연성이란 바로 무한한 변형의 가능성을 내포한 생명력의 상징적인 이미지이기에 그렇다. 탄력과 유연성은 바로 그의 최근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조형적인 특징이다. 최근 수년 동안 몰입하고 있는 항아리 작업은 유약이라는 재료의 가능성을 다각도로 실험하는 과정에서 얻어진 이른바 요변의 결과물이다. 흙은 작가의 의도에 충실히 복종한다. 반면에 유약은 가마 속에서 불과의 은밀한 만남을 통해 작가의 예측을 무색케 만든다. 그러기에 그는 오히려 요변의 그 무한한 가능성을 제작의 한 과정으로 설정하고 있다. 예측할 수 없는 변수를 역이용하는 방법을 연구함으로써 새로운 표현이 가능하리라는 판단이었다. 최근 그가 개발한 그릇 표면의 전혀 새로운 문양은 이러한 노력의 결과이다. 유약의 덩어리(고체형태)로 만들어 항아리 위에 덮어씌우는 방식의 작업으로 전혀 새로운 개념의 표면 문양과 질감을 얻고 있는 것이다. 마치 하나 하나 붓으로 그린 듯한 정교하면서도 우연성이 풍부한 문양이 요변의 결과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그런가 하면 마치 화산이 분출한 휴화산에 쌓인 만년설을 연상케 하는 독특한 모양의 항아리도 요변과의 합작품이다. 이렇듯 유약을 단순히 표면을 씌운다는 이전의 개념에 그치지 않고 유약 자체를 문양 및 형태에 직접적으로 관여케 하는 것이다. 이로써 표면의 효과는 물론 형태미에서도 조형개념을 확대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게 된 셈이다. 최근 유약을 문양 및 형태미에 전용하는 일련의 항아리들은 성적인 이미지와 내용을 담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항아리의 과장된 양감은 여체의 둔부를 상징하며, 휴화산의 형태에 덮인 만년설의 이미지는 남자의 성을 상징한다. 산의 형태는 절정에 달하는 성적인 욕구 및 그 표출임과 동시에 남성의 심볼을 나타내며 만년설은 분출하는 정자의 이미지가 된다. 그런가 하면 양감이 강조되는 항아리는 그 자체가 곧 여성의 음부로 상징된다. 그는 여기에서 성의 시각적인 효과보다는 암수가 만나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이끌어내는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고자 한다. 그러기에 에로티시즘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다. 생명의 순환에 대한 한 작가로서의 엄숙한 성찰인 것이다. 이와 같은 다양한 형태 및 내용을 추구하는 그의 작업도 궁극적으로는 점토와 유약이 지닌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탐구로 요약된다. 그러기에 그는 유약에 대한 자기 데이터를 만들지 않는다. 항상 새로운 그릇의 가능성만을 기대할 뿐인 것이다. 어떤 하나의 형식에 갇히지 않고 흙과 유약 그리고 불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결과물에 탄복하고 승복할 따름이다. 그는 유약의 색채에도 관심이 많다. 그래서 높은 온도의 전통 도자기 기법과 함께 저온도의 현대적인 개념의 작업을 통해 유약이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색채의 아름다움도 즐긴다. 그에게 도예에 관한 궁극적인 목표는 없다. 항상 새로운 사실과 만나는 기쁨에 스스로를 맡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