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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aft의 개념
2005-03-04 (금) 00:00 조회 : 2636

Craft의 개념 

박수아

                                                                Encyclopedia of Aesthetics(Oxford, 1998) pp. 450∼453

Craft(공예)는 현대 미학 안에서 두 가지의 서로 관련된 의미를 발전시켰다. 공예는 그리스의 techne와 로마의 ars 시대로부터 18세기까지 내려오는  "art(예술)"와 동일한 의미로서, 제품이나 행위에 있어서의 인간의 능력을 나타낸다. 공예는 또한, 어떤 능력에 대한 결과로 나타나는 활동이나 오브제(object)를 나타낸다. 1750년 경 "순수미술(fine arts)"이 일반적인 미술로부터 분리되었을 때, "공예"는 숙련된 행위와 그것의 생산품이라는 기존의 관념 안에서 미술의 유의어로 남게 되었다. 그 결과로, 19세기의 관습이 순수(fine)를 순수미술(fine art)로부터 떨어뜨렸을 때, 순수미술과 일반적인 미술 사이의 대비는 예술과 공예 사이의 대비로 표현되기 시작하였다(다른 용어도 사용되고 있기는 하다 : 실용예술(useful arts), 장식예술(decorative arts), 산업예술(industrial arts)). 19세기 중반까지, "예술 대 자연"이라는 기존의 대비는 "예술 대 공예"라는 새로운 극성(polarity)으로 대체되었다. 역설적으로, "공예"가 인간 기술의 산물이라는 예술의 옛 의미를 취했음에 반하여, 예술 대 공예라는 새로운 한 쌍 안에서의 "예술"은 이제 자발적인 창조로서의 자연의 모델로 스스로를 생각한다. 새 극성의 구조 안에서, 4개의 요소가 공예의 개념과 연결하여 생각된다 : (1) 기능의 탁월함, (2) 수공 기술과 전통적 형태의 우월함, (3) 시장의 요구와의 약속, (4) 순수미술의 위풍에 비하여 낮게 여겨지는 매체의 사용(시각 예술 안에서의 점토, 금속, 섬유, 나무와 노래, 춤, 그리고 음악과 문학의 스토리 형태)
그러나 18세기 이전, 일반적인 예술 안에서는 현대순수미술(contemporary fine art)/공예의 전조가 되는 분류가 있었다 : 자유로운 예술(liberal arts) 대 기계적인 예술(mechanical arts)의 도식. 고대로부터 17세기까지, 자유로운 예술은 문법, 수사법, 변증법, 산술, 기하학, 천문학, 그리고 음악을 포함했다  ; 기계적인 예술은 그 외의 모든 것을 포함했다. 신발을 만들고 상을 조각하는 것에서부터 음식 만들기, 색을 칠하기 등. 간접적으로 시를 제외하고는 나중에 순수미술로 여겨지는 것들 중 어떤 것도 원래 자유로운 예술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행위는 손을 쓰는 활동이기 때문에 "음악"은 본래 음악이론을 뜻했다.). 미술과 음악의 역사에서 자주 반복되는 공통적인 부분은 순수미술과 공예가 르네상스 시기에 분리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본질적으로 소수의 화가, 조각가, 작곡가와 문필가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예를 들어 회화와 조각의 "기계적인(mechanical)" 상태보다 "자유로움(liberal)"에 대한 주장은 17세기 말부터 대부분의 유럽에서 논의되고 있었다. 그리고 미술의 역사가 전통적으로 집중해 왔던 많은 엘리트들조차도 특별한 목적과 공간을 의도하는 제한된 계약과 생산품 아래에서 작업했다 ; 예를 들어 레오나르드 다 빈치의 Virgin of the Rocks는 내용, 색, 배달 날짜, 그리고 보수의 보장 등을 명기한다. 어떤 사람이 르네상스기부터 17세기까지 회화나 조각 분야에서 점진적으로 명성을 높였다 하더라도, 많은 화가나 조각가들은 공예분야에 소속되려고 했으며, 위임된 일로부터의 기능적인 제품으로 향했다. 그리고 많은 작곡가들은 그들을 하인보다 조금 나은 위치로 만드는 제한된 계약 아래에서 귀족이나 종교기구를 위해 일했다. 예술가(artist)와 공예인(craftspeople) 사이의 실질적인 차이의 결여는 17세기 중반까지 내려온 artist라는 용어의 언급이 그룹으로서의 화가, 작가, 그리고 건축가가 아니고 liberal art 학생이거나 연금술사라는 사실을, 그리고 18세기에 들어 artist와 artisan(장인)이 서로 대체되며 사용되어 왔다는 사실을 어의적으로 반영한다.
1746년 Abb  Batteux가 beaux art의 일반화된 범주의 체계적인 진술을 제공했을 때, 그는 즐거움 대 소용이라는 기반 위에서 순수미술을 기계적인 미술로부터 분리시켰다. 이 새로운 전문용어와 기준은 유럽에 급속도로 확산되었고, 곧 다섯 개의 순수미술의 핵심이 인정되었다(시, 음악, 회화, 조각, 건축). 아마도 화술, 춤, 새기는 것(engraving), 그리고 정원 가꾸기들 중 여섯 번째나 일곱 번째가 첨가될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은 기계적인 미술이나 수공예(handicrafts) 부분으로 남았다. (독일어로 Handwerk, 프랑스어로 m tier나 artisanat, 이태리어로 mestiere) 예술 대 공예 도식은 그룹으로서의 순수미술을 도기제조(pottery), 직조(weaving織造), 그리고 자수(embroidery) 등과 같은 기계에 의한 공예(instrumental crafts)의 영지로부터 분리시킨 것 뿐 아니라 순수미술 각각에 적용되기 시작했다 ; 예를 들어, 이젤 회화는 장식 회화로부터 날카롭게 분리되고, 콘서트의 오페라나 심포닉 음악은 식사나 춤을 위한 음악과 분리된다. "순수(fine)"라고 여겨지는 종류의 예술 안에서도 약간씩의 변화는 있다, 예를 들어, 역사화로부터 내려온 풍경화, 초상화, 꽃그림은 은(silver) 작업이나 Louis ⅩⅤ의 실린더데스크와 같은 가구 등 공예의 영역에 가까운 하위장르와 함께 순수미술의 지위에 접근하고 있다.
동시에 기존의 예술의 개념은 순수미술 대 공예로 나눠졌다. 장인/예술가의 통합된 개념 역시 예술가 대 장인 창의적인 천재 대 숙련된 기능인으로 명확하게 나눠졌다. 18세기 말, 예술가라는 용어는 마침내 그것의 현대적인 의미를 얻어, 음악과 문학을 포함한 모든 순수미술의 작가를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고, 독립성, 창조성, 상상력을 스스로에게 끌어 모았다. 한편, 장인이나 공예인이라는 용어는 이제 쓸모 있는 공예품의 제작자를 위해 유일하게 남겨졌고, 기술, 복제, 종속, 그리고 거래와 같은 개념의 사용으로 인하여 예술가와 대비하여 명쾌하게 정의되었다. 이상적인 예술가는 내부의 열정에 의해 창조하도록 움직이고 돈이나 의견에 대해서는 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 대조적으로 장인이나 공예인은 다른 비즈니스처럼 이윤을 고려하여 어떤 것을 제작하는 작업장의 분위기 안에서 고찰된다.
18세기 말, Immanuel Kant는 예술/공예 와 예술/장인 극성에 대해 철학적인 기원을 찾으려 하였다. 그는 공예를 즐거움만을 겨냥한 미술인 "free"로부터 "지불된 미술(paid art)"로 구별하였다. 그리고 순수미술 안에서 형태에 대한 이해와 창조력의 사심 없는 행동에 기반한 미학적인 즐거움으로부터 감각적인 즐거움을 구별하였다. 대조적으로 공예 작업은 흥미나 목적에 기반하여 이해되는 어떤 것이다. 칸트는 또한 개개의 것이 만들어지는 방법에 의해 순수미술과 공예를 구별하였다. 순수미술은 비범한 재능과 정신을 위한 지칠 줄 모르는 근원이 되는 특성의 풍요한 상상력에 의한 산물이다. 반대로 공예는 일상적인 진행과정에 따라 운반된 특정한 의도의 결과이다. 공예 제작자가 자주 테이블웨어와 같은 품위 있는 작업을 한다고 하더라도 칸트는 그것들이 미학적으로 목적과 별개로 보여지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순수미술가 될 수 없다고 관찰한다.
순수미술/공예의 대비에 대한 로맨틱 이론가들과 이상주의 철학가들의 주요한 공헌은 순수미술을 형이상학적인 절대성과 숭고한 소명을 가진 예술가의 이상이라는 지위로 승격시킴으로서 예술과 공예 사이의 거리를 넓혔다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산업혁명으로 인한 값싼 물건들의 범람이 많은 직인(weavers), 도공(potters)와 다른 이들로 하여금 그들의 작업장을 포기하고, 노동자로서 공장에 들어가게 함으로써, 많은 공예가 공예기술과 함께 사라지기 시작했다. 많은 영국 공장의 잔인한 조건과 평범한 디자인의 생산품은 John Ruskin과 William Morris가 산업적 구조와 순수미술과 공예 극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들은 장인이 도구를 사용하여 그들 고유의 작업을 디자인하고 실행할 수 있는 자유로운 작업환경을 요구했다. Ruskin과 Morris의 순수미술과 공예의 재결합 요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공예가 기반이 되고, 회화, 조각, 시 등의 순수예술, 그리고 정상에 음악이 있는 피라미드 형태로 성립된 예술의 계층구조가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아이디어를 발전시킨 예술과 공예 운동의 비현실적 실험은 곧 없어졌지만, 두 개의 유산을 남겼다 : 산업과 건축의 장식 미술과 밀접하게 연관된 모든 디자인의 개념, 그리고 소량의 제품을 생산하는 도자기 공방과 직물, 보석, 가구 작업장의 공방공예운동(studio craft movement). 그러나 디자인 운동은 디자이너(예술가)와 제작자(장인)를 분리함으로써 Ruskin과 Morris의 중심 원칙에 반박한다. 공방공예운동은 단순한 삶에 대한 향수에 물든 공예 작가를 해방시키는 데에 실패했다. 공방공예운동은 공예라는 용어에 부가적인 의미를 주었다-점토, 섬유, 나무, 유리 또는 기계 제품의 대체품으로 팔리는 금속 안에서의 장식적인 미술의 핸드메이드 아이템. 미술관은 일상생활을 위한 수공예작품과 현대적 디자인의 산업 제품 모두를 아우르는 장식 예술(decorative art)이라는 용어를 일반적으로 선호한다. 덧붙여, 공예라는 용어는 역시 문화적으로 낮은 위치의 다른 세가지 형태의 활동과 지금까지 관계를 맺어왔다 : "공예조합(craft unions)" (목공, 배관, 석공), 급하게 사라진 "지역 공예(country craft)"(대장장이, 의자 제조가, 퀼트 제조가), 그리고 "가정", "취미", "학교", "캠프" 공예(나무작업, 바느질, 모델 짓기).
대부분의 20세기 철학가는 순수 미술 안에서, 제품으로서의 공예, 기술로서의 공예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문제에 스스로 관여한 적이 있다. 공예의 일반적인 개념에서 벗어나 본 적이 있는 몇 명 중, R. G. Collingwood(1938)는 예술/공예 극성을 그의 미학의 정력적인 모티브로 만들었다. 그는 공예를 수단과 목적에 관련된 계획과 실행, 원재료와 제품, 물질과 형태의 시리즈를 통하여 예상된 결과를 달성하기 위한 시도로 정의함으로써 "바람직한 예술"와 "공예" 사이의 혼동을 공격했다.  그에 따르면 바람직한 예술이란 산출물이 무엇이 될지 모르는 것에 대한 예술가의 표현과 상상력의 문제이다. 칸트와 같이 그는 예술과 공예를 장르나 매체보다 원칙에 기반해서 분리하는 철학적인 식별을 얻으려 하였다. 이를테면 해석활동을 요구하는 견지에서 감정을 표현하는 음악은 예술인 반면에, 찬송가나 애국적인 행진곡처럼 감정을 유발하는 수단으로서 창조된 음악은 공예이다. 많은 철학자들이 콜링우드의 예술/공예 극성, 특히 그의 예술에 대한 이상적인 관점이 너무 까다롭다고 비평했고 예술/공예의 구별을 철저히 부인한 사람도 있었다. 반대로 예술/공예 구별은 대부분의 미학, 미술 비평, 그리고 미술사에서 받아들여졌다. 1962년에서 1990년대 초기까지 널리 이용되었던 H. W. Janson(1962)의 미술사 텍스트는 예술과 공예의 구별을 미술사를 공부하는 전제조건이라 규정하는 에세이로 시작한다. 
John Dewey는 예술과 공예의 구별을 거부했던 소수의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미학적 경험을 일반적 경험의 양상으로 만드는 것을 통해, 순수미술을 일상생활과 기능미술(useful art)에 접목시키기를 원했다. 초라한 농민의 그릇으로부터 섬세한 르네상스 회화까지를 연속체라고 단언하며, Dewey는 오브제의 유용성이 그가 미학이라고 부르는 격렬한 성취 경험을 막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의 순수미술과 공예에 대한 이원론 비평에도 불구하고, Dewey는 통합적인 인생 경험을 위한 오브제의 은유적인 "소용(use)"만이 미학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 그는 또한, 단지 "기계적"으로서 테크닉을 눈에 띄게 하는 작업을 염두에서 쫓아버리며 공예기술을 단호하게 제2의 위치에 배치하였다.
스스로를 20세기  "반예술(anti art)"의 지지자라고 자각하는 사람들은 공예를 순수미술로 재평가한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Aleksandr Rodchenko나 Varvara Stepanova와 같은 러시아의 구성주의자들은 예외이지만, 순수미술의 형식을 공격했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공예와 공예인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Marcel Duchamp은 Post-Impressionist이건 추상적 버전이건 그가 "merely retinal"이라 불렀던 것을 거부하며, 회화에 있어서의 공예기술의 남겨진 요소들을 경멸했다. 뒤샹의 "레디메이드(readymades)"-눈삽, 병걸이, 또는 소변기와 같이 평범하게 제조된 아이템들-중 어떤 것도 공예적 가치의 확언을 반영하지 않는다. 산업제품으로서, 그것들은 그들이 기술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에 의해 선택되지 않았으며, 뒤샹이 예술의 상징적인 작업으로 그것들을 전시한 것은 그들의 기능성을 부인한 것이다. 역설적으로, 뒤샹은 이후의 개념미술의 이론가들과 같이, 예술가를 지성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해 예술을 강등시켰다. 중요한 것은 예술가의 아이디어이며 기술이 아니다 ; 예술가의 독립이며 통상적인 필요가 아니다 ; 예술가의 창조적인 제스쳐이며 오브제가 아니다-순수미술의 자율적인 작품이건 수공예의 쓸모 있는 작품이건 간에.
지난 20년을 지나며, 많은 비평가와 미술사가들이 예술과 공예를 구분 짓는 선이 없어지며 순수미술과 공방공예의 오브제가 비슷해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순수미술과 공방 공예의 집합은 1950년대 말기, 예술가가 "혼합매체(mixed media)" 작업 안에서 금속, 나무, 또는 플라스틱의 공예 매체를 사용하기 시작하고 소수의 공예인이 점토나 섬유를 이용하여 비기능적인 오브제를 제작하는 최근의 미술 세계 스타일을 받아들이며 시작되었다. 비평가, 갤러리, 그리고 미술관들이 열광적으로 반응하였고 1970년대까지 도공(potters)은 "도자 조각가(ceramic sculptors)", 직인(weavers)은 "섬유 예술가(fiber artists)", 그리고 새로운 종류의 공예가 일괄되어 "공예 매체에서의 예술(art in craft media)" 또는 "예술로서의 공예(crafts-as-art)"로 명시되었다. 동시에 페미니스트들은 순수미술로부터 퀼트나 자수와 같은 가사공예의 배제를 공격하여, 곧 퀼트는 미술의 지위로 진급했고 섬유 미술가들은 "예술 퀼트(art quilts)"로 전환했다. 1990년대 Smithsonian의 Renwick 갤러리는 그것의 American Crafts의 영구적인 컬렉션을 위해 "기능이나 디자인이 아닌 미학.... 본질적인 규범"을 만들었다. Renwick의 예술로서의 공예 오브제의 대부분은 공예를 위한 현대미술관에서 쉽게 전시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 많은 오브제들과 전통적인 공예 사이의 관계는 그것들이 점토, 나무, 섬유, 금속이나 유리로 만들어졌다는 것과 기술적 기교의 증거이다. 순수미술의 단면을 통과했다는 훌륭한 가치에 비교할 때, 많은 예술로서의 공예 작업은 여전히 매우 아름답게 만들어지지만 넓은 예술 세계의 흥미를 요구하기에는 지적이거나 정치적인 부분이 부족하다.
20세기 말까지, 순수미술에 포함될 수 있는 오브제와 활동의 범위는 넓어지고, 공예의 4개의 전통적 성격 중 적어도 2개에 대한 존경으로 예술/공예 극성은 부분적으로 지워졌다. 점토와 섬유건 팝송과 춤이건 예술 세계의 관행은 흡수된 매체가 역사적으로 공예와 관계를 맺었던 때 이래로 오랜 기간 이어졌다. Dewey부터 Ted Cohen과 Authur C. Danto에 이르는 미학자들은 실용적인 기능은 예술적 권위의 방해물이 아니라고 단언해왔다. 공예가 예술적 지위를 확보하는데 핸디캡이 되는 면은 시장에 대한 공공연한 관심과 기술과 형태를 만드는 것에 대한 강조이다. 전통적인 공예인이 쓸모 있는 아이템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들은 경제적인 업무나 소비자의 요구와의 관계를 숨기려 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들을 그것의 시장 활동을 창조적인 비범한 재능의 이상, 스스로 충분한 작업, 그리고 미학의 응시로 덮은 순수미술 세계의 속물근성으로부터 비난받기 쉽게 만들었다. 기술에 있어서, 아이디어와 영감에 대해 테크닉이 종속적 요소라는 사실은 르네상스기로부터의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20세기는 서투름이 어떤 진보된 예술적 권위의 상징이 되었다. 공예만이 그것의 기술적 측면에 의해 현대 미술 세계에서 가치가 저하되었던 것은 아니다. 18세기 이래로 테크닉은 일반적으로 Kant, Collingwood, 그리고 Dewey가 그러하듯이 대부분의 미학자들에 의해 경시되어 왔다. 현대 철학자들 가운데, V. A. Howard(1982)는 공예 기술에 호의적이고 지속적인 분석을 주었던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지금까지 많은 공예인은 공예작업의 형태와 기능의 조화가 현대 순수예술에서 부족한 깊이를 준다는 믿음으로 전통적인 테크닉과 형태를 반영하는 기능적인 오브제 제작을 계속하고 있다. 많은 전통적인 공예 제작자들은 "예술 세계"에 편입한 그들의 동료들의 한정된 범위에 반해, 그들의 작업이 그들을 천년의 유럽 공예 역사 뿐 아니라 전 세계에 걸친 복합적인 행위에 연결시킨다고 믿는다. 전통주의자들의 전망에 의하면, 예술로서의 공예 작가는 예술/공예 극성을 극복하지 못했지만, 순수미술이라는 용어에 대해서 순수미술 세계에 단순히 투항했다. 자연스럽게, 유럽과 미국의 공예 제작자들은 두 캠프로 깔끔하게 나누어지지 않았다 ; 많은 공예인은 예술로서의 공예와 전통주의의 중간위치를 점하고 있는데, "예술 가구"나 "예술 킬트"와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혁신적인 형태와 테크닉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아직 그들의 작업에서 소용을 주장한다. 공예 제작자들이 현대 예술 세계의 가치를 안기 위해 얼마나 멀리 가야 하는지에 관한 논쟁이 지금까지 이어진다는 것은 미학적 생각에 원인이 있음을 암시한다.
전통적인 공예 오브제의 훌륭한 가치, 예술이 순수예술과 공예로 나눠지기 이전 예술의 옛 개념과 연결된 가치는 공예 작업의 만지기(touch), 쓸모(use), 그리고 몸체(body)와의 관계이다. 예술로서의 공예 오브제는 자율적인 순수미술처럼 갤러리나 미술관에서 "do not touch" 이기를 선호하는 반면에, 기능적인 공예 작업은 단지 관상용이 아닌 만져지고 사용되면서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전통적인 공예가 낮은 서열에 머물고 있는 한 가지 이유는 그것이 신체적인 기능, 먹기, 마시기, 앉기, 자기, 그리고 입기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과 주요한 공예 제작자 중에 여성이 있어 왔다는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은 순수미술 안에 여성 예술가나 여성을 인정하는 장르를 더 포함시키는 것 이외에도, 공예와 일상의 소용의 관점에서 예술과 미학의 개념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인지해 왔다.
러스키니안(Ruskinian)의 향수나 마르크스주의자(Marxist)의 소용도 아닌 공예의 미학을 시작하려면 미학의 역사 중 어디로 향해야 할까? 분명히 Morris와 Dewey의 글, 그리고 William Horgarth의 미에 대한 감각적이고 실용적인 아이디어나 눈과 귀가 우월하다는 가정에 반대하여 "touch"를 지지하는 Johann Gotthried von Herder 등의 자료가 있다. 또한, 어떤 이는 Emily Dickinson, Sarah Orne Jewett나 Virginia Woolf와 같은 작가나 가내 초상화, 삶, 꽃 등을 그리기를 강요받는 화가들을 통해 일상의 중요성에 대한 여성의 생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최근 페미니스트들의 신체에 대한 탐구나 여성의 일에 대한 중요성의 탐구도 한 부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Todorov와 같은 현대의 도덕주의자들이 "영웅(heroic)"과 "평범(ordinary)" 덕성 사이의 차이를 숙고하듯이, 어떤 사람에게는 결국 사심 없는 감상, 스스로 만족하는 작품, 고결한 예술적 천재의 이상을 쉬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미학의 탐구가 필요할 것이다. "공예의 미학" 등의 용어의 프로그램을 계획하는 것이 위험한 이유는 마치 그것이 승격의 증거인 것처럼 누군가 공예를 현존하는 미학의 개념에 포함시키는 것에 쉽게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일상에서의 미학이라기보다는 일상적인 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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