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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 지노리<1>
2005-03-04 (금) 00:00 조회 : 2768
박수아/홍익대학교 도예연구소 연구원

리차드 지노리

 현재 세계 고급식기시장의 90%를 장악하고 있는 유럽산 도자기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영국의 웨지우드, 덴마크의 로얄 코펜하겐, 프랑스의 세브르, 독일의 마이센 등 소위 명품으로 인식되는 식기회사들의 역사는 곧 유럽자기의 역사와 같은 맥을 가지고 있다.
 유럽 경질자기의 역사는 18세기 전반 독일의 마이센에서 시작되었다. 폴란드의 왕이며 작센 공국의 제후인 아우구스트 2세의 명에 의해 중국의 것과 같은 백색자기를 만들기 위해 다년간 연구에 몰두하였던 연금술사 요한 프리드리히 베트거(Johann Friedrich B ttger)와 화학자 에렌프리드 티렌하우스(Eherenfried W. Tirchenhaus)가 독일의 마이센에서 자기 제조 비법을 밝혀냈다. 또한, 태토의 철분함유량을 줄이려는 노력 끝에 1710년에는 완벽한 백색 자기를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1718년에는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클라우디우스 이노센트 듀 파기에(Claudius Innocent Du Paquier)가 자기제조를 시작하였고 빈에서의 자기 생산은 150여 년 간 이어졌다. 마이센의 자기 제조법은 엄격히 비밀에 붙여졌으나 얼마가지 않아 유럽전역으로 퍼졌고 오늘날 유럽도자기를 명품화하는 초석이 되었다.

요한 프리드리히 베트거의 초상. 마이센

 

커피세트(일부). 마이센. 1725. 높이 20.5㎝(커피팟)

"유럽풍" 뚜껑이 있는 꽃모양 발. 빈. 1725∼30. 높이 26.3㎝

 

 이번 호부터 월간 크라트의 지면을 빌어 소개하는 리차드 지노리 역시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도자기회사의 하나이며 생산품 중 "이탈리안 프루츠"시리즈는 오랜 기간 세계인의 사랑을 받아 온 대표적인 브랜드이다.

 

1. 이탈리아 자기의 발생-메디치자기
 이탈리아가 자기제조의 비밀을 알아내려고 시도했던 최초의 나라 중 하나인 것은 이미 양질의 도기와 유리를 만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또한 근동(近東)과의 무역에 의해 자기를 접했기 때문에 제조법에 대한 호기심은 더욱 강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자기제조에 대한 최초의 실험은 2가지로 나누어지며 그 중 하나는 ‘자기풍의(alla porcellana)’ 푸른색 장식을 가진 마욜리카(Majolica) 기술을 개발한 것이었다. 그러나 마욜리카는 엄격한 의미에서의 자기라고는 볼 수 없으며 유리질과 같은 자기의 재료적 특성을 파악함으로써 유리 제조기술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으로 보여진다. 또 하나는 1470년경 베네치아의 안토니오 디 산 시메오네(Antonio di San Simeone)가 볼로냐의 점토로 자기와 비슷한 것을 만들었다고 전해지나 그가 제작한 것은 남아있지 않아서 사용했던 재료의 조성은 알 수 없다.
 따라서 15세기 이탈리아에서의 자기 제조에 대한 기술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16세기 초에 이르러 또 한번의 실험이 베네치아에서 이루어졌는데 뉴덴베르그에서 온 유리기술자 레오나르도 페링지(Leonardo Peringe)가 유리기법을 바탕으로 자기제조를 시도하였다. 점토와 유약에 산화석(酸化錫)을 첨가해서 흰색의 도자기를 만들기는 하였으나 자기라고 보기에는 미흡한 수준의 것이었다. 또한 르네상스기에 자연과학적인 최초의 실험이 몇 명의 이탈리아 귀족과 연금술사들에 의해 사보이(Savoy)와 우르비노(Urbino)의 마을에서 이루어졌다고 전해지나 실증적인 제품들은 남아있지 않다. 1560년에 페라라 공작(Duke of Ferrara)이 자기와 마욜리카를 위한 공방을 설립하고 까미요(Camillo)와 바티스타(Battista)의 우르비노(da Urbino)형제와 계약을 맺었으나 이 역시 만들어진 제품이 하나도 남지 않았기 때문에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15세기부터 약 100여 년 간에 걸쳐 이루어진 실험에서 진정한 의미의 자기는 만들어지지 않았으나 ‘메디치자기’는 자기제조 역사에 작은 진전을 가져왔다.
 유럽 최초의 원자기(原磁器, Proto Porcelain)라 할 수 있는 메디치자기는 피렌체의 대공인 프란체스코 마리오 디 메디치(Francesco Mario de Medici)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 자신이 열광적인 연금술연구가였던 메디치대공은 공방을 설립하고 마욜리카 제작자인 플라미니오 폰타나(Flaminio Fontana)와 베르나도 본탈렌티(Bernardo Buontalenti)등으로 하여금 자기를 제작하도록 하였다.
 메디치자기는 1576년에 이후 보블리 가든(Boboli Garden)과 카지노 디 산마르코(Casino di San Marco)의 가마에서 조직적인 생산을 하기 시작하였으나 어떤 종류의 것들이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며 1578년 1년 간 플라미니오 폰타나가 25∼30점을 구워서 팔았다는 기록만 남아있다. 이러한 기록을 바탕으로 생각해보면 메디치자기의 생산량이 많았던 것은 아니며 메디치대공 또한 가마의 운영으로 이윤을 보겠다는 것보다 자기의 생산으로 자신의 지위와 궁정에 영광을 더하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613년 피렌체 피티궁의 파티에서 손님들이 메디치가문의 문장이 그려진 도자기를 받았다는 역사적 기록으로 이 시기까지 메디치자기가 만들어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비센차(Vicenza)에서 채취한 백토에 흰색모래를 혼합하고 가루를 낸 수정(Quartz)과 주석(錫) 그리고 납성분의 매용제를 첨가하였으며 소성 후의 색은 황색을 띤 백색이나 회색으로써 스톤웨어와 비슷하였고 여기에 산화석이 함유된 흰색 유약을 칠하였다. 청색과 붉은색의 안료로 장식을 하거나 납을 함유한 저온유를 시유하기도 하였으나 유약 역시 그 성질이 조금씩 달라서 불투명한 것에서부터 광택이 있는 것 그리고 작은 균열이 생기는 것 등 여러 가지가 사용되었다.”
 이와 같은 내용을 미루어 짐작해보면 메디치자기 또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기는 아니라고 볼 수 있으며 다만 마욜리카나 기타 도기질의 것보다 좀더 자기질에 가까운 즉, 스톤웨어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후 이탈리아에서 자기생산은 18세기에 이르기까지 특별한 진전은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기록 또한 남아있지 않아 마욜리카 양식의 것만이 생산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2. 이탈리아 경질자기의 탄생과 돗챠가마의 태동
  1720년에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베치(Vezzi)형제가 마이센 도공을 통해 비법을 알아내 자기제조에 성공하였으나 오래 지속하지 못하고 문을 닫게 된다. 그렇지만 이탈리아에서 경질자기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으며 피렌체 근교의 돗챠(Doccia) 지역에서 1737년경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백유큰접시(白釉大皿). 지노리. 제1기(1745∼1750). 폭 30.5㎝

꽃모양의 전채(前菜)접시. 지노리. 제1기(1745∼1750). 폭 22.5㎝

 

 돗챠지역에서 경질자기의 생산이 가능하였던 것은 태토는 물론 틀-점토를 초벌하여 몰드로 사용하는 것을 말하며 우리나라에서는 도범(陶范)이라고 한다.-을 만들 수 있는 재료로서의 점토혼합에 대한 연구와 실험이 행해졌던 결과이며 이는 지노리가마가 태동하는 초기의 개척단계에 속한다.  
 18세기 초엽의 피렌체는 상업과 새로운 생산활동 면에서 발달한 지역은 아니었다. 따라서 돗챠가마의 발생과 업적 등은 그 당시의 사회적인 배경보다는 창시자인 카를로 지노리(Carlo Ginori)후작의 천재성과 다재다능함, 나아가 혁신을 추구하는 인물의 성격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여진다.

가스페로 브루스키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카를로 지노리 흉상》. 지노리. 제1기(1760년 경). 높이 61㎝

 

 카를로 후작은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가진 사람으로서 활동의 폭이 매우 넓고 다양하였다. 그는 시의원이면서 리보르노(Livorno) 항구의 관리자였으며 농업의 개량과 새로운 조직화의 추진자이기도 하였다. 고가의 수제품 직물을 생산하였으며 이탈리아의 토스카나 지방에서는 구하기 힘든 앙고라털과 같은 상품의 수입을 목적으로 하는 해상무역의 입안자이기도 하였다. 귀족계급 출신으로서 선대로부터 몇 대에 걸쳐 내려온 권력을 가졌고, 피렌체 사회에서 중추적인 지위를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미래지향적인 성격과 새로운 기술과 지식에 대한 열린 관심,  그리고 기업가로서의 강한 정신력을 갖추고 있었다.
 1737년 돗챠에 설립된 가마는 그 후 150년 간에 걸쳐 지노리가의 소유였다. 그동안 지노리가는 5대가 흘렀으며 가마를 운영·관리했던 5대 각각의 당주는 운영조직의 구조뿐 아니라 제품의 조형이나 생산품의 선택에서도 엄격한 지침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3. 지노리가마의 시대별 구분
 지노리가마의 생산 구분은 각각의 당주가 운영했던 시기와 일치하여 연대적으로나 양식적으로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제1시기(1737∼1757)는 카를로 지노리가 돗챠에 위치한 그의 별장에 가마를 만들고 성형디자인을 맡기기 위한 조각가 한 명을 고용하였던 1737년이 시작점이라고 본다. 조각가 가스페로 브루스키(Gaspero Bruschi)는 돗챠자기공장의 탄생과 전개에 크게 공헌하였고 1778년까지 활동하였다.   
 제2시기(1758∼1791)에는 카를로 지노리의 세 아들 중 장남인 로렌조 지노리(Lorenzo Ginori)가 자기공장의 운영과 관리에 전념하던 시기이다.
 제3시기(1792∼1837)는 카를로 레오포르도 지노리 리시(Carlo Leopoldo Ginori Lisci)가 부친의 일을 계승하였던 시기이다. 로렌조 지노리가 판매에 힘을 기울였다면 카를로 레오포르도는 자기공장의 개선을 중시했다는 특징을 보인다.
 제4시기(1838∼1878)의 로렌조 2세 지노리 리시(Lorenzo Ⅱ Ginori-Lisci)는 1838년부터 부친의 뒤를 계승하였으나 실질적인 운영관리를 개시한 것은 파리에서 화학연구를 마쳤던 10년 정도 후부터였다. 그는 자기공장을 기득권의 단순한 계승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장의 운영에 대해 전문가로의 입장에서 깊이 연구하였다.
 제5시기(1879∼1896)는 로렌조 2세의 죽음에 의해 운영권이 4명의 아들 중 장남인 카를로 베네딕트(Carlo Benedetto Ginori Lisci)에게 옮겨졌던 1879년부터이다.

 1896년 지노리자기공장은 리차드도자기회사와 합병하게 된다. 합병으로 인해 회사는 대기업의 모습으로 바뀌었고 생산의 편성·대체·교환을 이루어, 단단한 다공질도기의 생산이 밀라노 근교의 산 크리스트포로 공장에 집중되었으며 과거의 영예에 대한 경의는 돗챠 공장에서 자기생산을 특화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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