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도예의 정체성은 어떻게 정립되어 가고 있는가? 

우관호

한국 현대도예의 정체성은 어떻게 정립되어 가고 있는가?
우선 '현대도예'라는 용어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된다.
이 글에서는 현대도예를 '동시대에 만들어지는 모든 도예활동의 소산'으로 정의하기 보다는 철저하게 조형적 포름을 추구하는 순수예술적 창작활동에 국한시키고자 한다.
또한 사견임을 전제하면서, 우리나라의 현대도예의 역사는 지난 70년대부터 이루어져 왔다고 단언한다. 따라서 지난 30여년간의 궤적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현대도예의 정체성 정립 유무와 진행에 대해 언급하기로 하겠다.

정체성에 대한 논의는 비단 도예에서뿐 아니라 예술적 행위를 포함한 인간이 행하는 모든 지적 활동에서도 다루어진다.
'정체성'은 본디의 참모습으로서 자기의 의지나 판단에 바탕을 두는 주체성을 마련하는 근간이 된다고 할 수 있으므로 양자간에는 필연적인 인과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 현대도예의 정체성은 어떻게 정립되어 가고 있는가?' 라는 것은 곧 주체성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물음과도 상통하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을 던지기 전에 우리나라 현대도예의 정체성은 무엇이며 나아가 그것을 정의할 수 있는 준거는 마련되어 있는가를 판단하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된다.
섣부른 결론인지도 모르겠지만, 동종 행위자 한사람의 상식으로 판단하자면 우리나라 현대도예의 정체성 확립은 물론 그것에 대한 모색 또는 시도 또한 아직은 요원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여기에는 우리나라 현대도예의 역사가 일천하고 작가의 수도 한정되어 있으며 또 작가의 대다수가 도예과나 도예전공 출신자들로 이루어져 재료를 다루는 기술은 회화나 조각에 비해 전문성은 가지고 있을지 몰라도 조형을 전개하는 어법에 대해서는 아직 서투르다는 등의 이유를 들 수도 있을 것이다. 덧붙여 현대도예가 특별한 사조나 이슈에 의해 자생적으로 태동되었다기 보다는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모방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솔직한 표현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적어도 30여년의 시간은 우리에게 우리의 것을 돌아보게 하는데 결코 짧은 세월은 아니었다고 판단한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이루어졌던 갤러리와 미술관의 기획전 특히 94년 현대미술관의 '한국현대도예 30년전'은 우리로 하여금 '정체성 규명'의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되며 '월간공예', '공예미술', '월간도예' 등 저널에서 다루었던 많은 기획기사들은 '정체성 확립'을 촉구하는 견인차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에 이르러 정체성이 어떻게 정립되어 가고 있는가? 라는 물음은 다분히 자가당착적인 발상이 아닐까 한다. 오히려 정체성 정립을 위해 어떤 노력이 경주되어야 하는가 라는 화두가 옳지 않을까?

이 글을 위해 필자는 나름대로 객관적 자료를 얻기 위해 몇가지 시도를 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가 대학생, 대학원생 및 학교를 갓 졸업하고 작가의 길로 접어든 젊은 층들과의 대화였다. 대다수의 대화자가 하는 말이 '정체성이 정립된 것은 아니다', '잘 모르겠다' 였으며 소수의 경우에는 '그게 뭐 그리 중요한 명제냐' 등으로 소극적인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또한 공모전 출품의 경험과 대학 동문전 등을 빗대어 획일적이라는 뜻의 '개인전'이라는 비유까지 서슴치 않는 것을 보고 아직 우리나라의 현대도예는 과거에 비해 크게 달라진 점이 없음을 알 수 있었다.
이와같은 소극적이고 회의적인 태도들은 우리나라 현대도예의 형식과 내용에 대한 소통코드가 전무한데서 기인하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기이한 현상 중의 하나라고 판단된다.
또한 젊은 층들일수록 정보의 입수가 빠르기 때문에 외국 유학작가들에 대한 비판도 신랄하였다. 자기발전을 위한 유학이 아니라 외국의 경향을 표절 내지는 교묘히 변조한 작품들도 적지 않다는 지적들이 그 점을 대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같은 비판적 정서의 이면에는 우리나라 현대도예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를 긍정적으로 조명할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을 읽을 수도 있었다. 지금 새롭게 시작하는 젊은 층들은 과거 30여년간 풀지 못했던 여러 가지 문제와 제약들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세대이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교수로부터 얻지 못했던 많은 지식과 정보들을 무제한 탐색하여 걸러낼 수 있는 도구들도 발달하였고 다른 장르들도 쉽게 넘나들 수 있는 제도적 발판도 마련되어 있으며 특히 도예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였다는 사실에서 그들은 자유롭고 발전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례로 유럽과 일본의 공모전 등에서 입상하는 경우가 빈번해졌고 아직은 소수이긴 하지만 몇몇 작가의 경우에는 외국 갤러리의 전속작가로 활동하는 경우 등을 들 수 있다. 그만큼 활동 무대가 넓게 열려 있고 또 작가들의 창의력 또한 세계적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현대도예는 도예라는 울타리안에서 안주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고 또 그렇게 해서도 아니 될 것이다. 이제 전통도예미의 재발견이라는 슬로건은 현대도예가들을 위축되게 하는 짐이 되어서는 안되며 작가 역시 보다 크고 넓은 안목과 생각으로 우리나라 현대도예의 정체성 정립을 위해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한편 IMF는 도예계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지난 2년간 많은 변화를 불러 일으켰다. 그전부터 선회하기 시작한 기성작가들은 물론 젊은 작가들도 무모하게 조형의 열병을 앓기 보다는 도예의 일차적 목적인 '실용'의 문제에 천착하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은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크다.
몇몇 갤러리들이 그들에게 문을 연 것도 그와 같은 현상을 고무시키는 역할을 하였음을 부인할 수 없으며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따라 작가 자신의 등급이 가려지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라 할 것이다.
양질의 작품을 요구하는 수요자들은 작가들로 하여금 현실성을 깨닫게 하였고 또 그러한 자각을 바탕으로 자신의 고유성을 탐색하게 하였다. 결국 싫던 좋던 작가들은 나름대로 자신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많은 번민을 하지 않을 수 없고 그 결과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자신의 작업장에서 유아독존적으로 자위해 왔던 미적 규범을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실용미'와 '전통미'에 대한 인식을 재고하고 나름대로의 기준을 세우지 않았을까?
바로 이런 점들이 적어도 '그릇'을 만드는 작가들에게는 정체성 정립의 촉발점이 되었다고 판단되며 이러한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존재하는 한 이 부류의 작가들은 자연스럽게 정체성을 몸에 익혀 나가고 있다고 보아진다.
그렇다면 이와같은 현상들이 왜 조형적 양식의 현대도예에서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까? 왜 이 부류에 속하는 작가들은 위기감(?)을 체감하지 않고 있을까?
감히 진단하자면 최소한의 견제도구도 그들 주위에 존재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악스러운 논쟁도 없고 질타할 어떤 제도도 없으며 감히 뭐라고 꼬집을 비평가도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전문매체에서도 작가들의 활동을 알리는 수준에서 품위를 견지하고 있기 때문에 "현대도예에서의 정체성'은 말 그대로 표류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이천, 여주, 광주 및 올해의 경우 목포에서도 도예축제가 있었고 거기에 수반되는 공모전 및 부산의 국제도예대전, 서울현대도예공모전, 공예대전 등 크고 작은 공모전 등이 있지만 어떤 경우에도 꼭 같은 방식으로 심사하고 시상하는 것 외에는 반론도 없고 비평도 없다는 사실은 현대도예의 부피만 키우는 결과 밖에 낳지 못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왜 그럴까? 대안은 없을까?
곰곰히 생각해 봐도 그와같은 현상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고 장기간 진행되어 왔던 것으로 보면 우리들 스스로 변화의 물꼬를 트기를 주저하였으며 그 책임의 소재는 우리들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결론지어 진다. 그렇다면 이런 방치상태를 언제까지 보고만 있어야 할 것인가?
이제 현대도예의 양적 팽창은 우리나라 실정을 넘어서는 수준에 이르렀다. 30여년의 시행착오도 겪어 보았고 조각의 아류라는 현대미술의 비아냥도 들어보았으며 비평가들의 주례사도 들을 만큼 들었다고 판단된다.
금세기 마지막에 이르러 '우리나라의 현대도예의 정체성은 어떻게 정립되어 가고 있는가?'라는 주제를 집안잔치의 도구화하기 보다는 우리 스스로 정체성을 정의할 수 있는 대안부터 세우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이 글의 주제에 대한 결론은 글의 앞머리에 내렸으므로 몇가지 대안으로 정체성 정립의 디딤돌로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현재 대부분의 현대도예가들이 대학출신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마땅히 현행 대학교육에서의 방법적 개혁이 필요할 것이다. 무엇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왜 만드는 것이며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하는 능동적인 사고력의 배양없이는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작가 개인의 정체성과 주체성 정립이 곧 우리나라 현대도예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원소가 되기 때문이다.
둘째, 현재 지역별로 이루어지고 있는 여러 가지 형태의 워크샵과 축제등을 보다 조직적으로 구성하여야 한다. 일반적으로 여름방학기간에 많이 이루어지는 국제 워크샵의 경우 특정한 주제나 이슈보다 주최자의 친분과 판단에 의해 작가 초청이 이루어지고 진행되기 때문에 한 작가가 시차를 두고 두곳의 워크샵에 참가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였으며 국제세미나의 경우도 주최학교 내지는 단체의 소수를 위한 행사로 그쳐버리는 경우도 왕왕 있기 때문이다.
셋째, 지역과 학교, 작가 상호간의 소통구조를 확립하여야 한다. 이는 위의 두가지 사안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방법이며 장기적인 차원에서의 도예발전에 대한 대안 제시 및 실행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학회설립'이 있다. 현재 영남지역에서 발기된 공예학회가 있고 수 년전에 도예학회에 대한 움직임이 있었으나 실행에 이르지는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학회'는 미국 NCECA나 영국Craft Council 과 같은 체제를 표방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의 장단점을 분석하고 면밀히 준비하면 보다 바람직한 조직으로 탄생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학회는 현대도예에 관한 학술적 탐구는 물론 대학간의 교과목, 설비, 기자재 등에 대한 정보 교환 및 작품의 유통 및 디자인개발지도 등 다양한 방면에서 역할을 해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상 제안된 대안들이 다분히 원론적인 성격에서 벗어나지는 못하지만 이와같은 노력들을 통해 우리나라의 현대도예가 정체성을 확립하고 후발주자로서의 약점들을 극복하지 않으면 고려와 조선 천년 역사의 산물의 끝자락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은 자명한 사실이 아닐까?

*이 글은 월간도예 기고내용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