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도공 - 400년의 드라마(심수관가) 
 
천종업

1998년 여름, 일본의 도자기명문인 심수관가의 <4백년만의 귀향, 일본 속에 꽃핀 심수관가의 도예>란 전시회가 한달반 가량 일민미술관에서 열렸는데 이 전시회가 예상외로 관람객들의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전시회를 보기 위한 인파가 한여름 뜨거운 햇볕아래 꼬리를 잇고 전현직 대통령을 위시한 정관계 인사들이 관람하고 문화 예술계는 물론 평소 이런 류의 전시회는 별 인연이 없어보였던 일반 시민 학생들의 발길이 끊기지 않아 이 전시를 주관했던 일민미술관이 연장전시를 단행했고 총 5만명이란 관람객의 기록을 올린 사실은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대성황의 전시행사였다.
그 뿐이 아니다. 전시된 수백점의 도예작품과 심수관가의 비장의 유품들은 관람객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4백년전인 1598년 남원성에서 끌려간 조선도공들이 그 당시로는 문명의 오지나 다름없던 일본땅에서 도자기문화를 꽃피웠던 4백년간의 드라마는 관객들을 압도하기에 족했다. 더욱 이들 도공들이 본국에서는 하찮은 장인에 불과한 하층민이었지만 일본에서는 사족이라는 무사급의 예우를 받으며 도예에 정진했고 급기야 오늘날 세계적으로 각광받고 있는 일본도자기 산업의 개조가 되었다는 사실은 우리 관람객들의 민족적 자긍심을 한껏 드높여 주었다.

그러나 이같은 심수관가의 명성이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임진란 당시 끌려간 조선도공들의 민족적 자긍심과 망향의 절규가 예술혼으로 승화하여 14대 4백년간의 시공을 이어주는 고리가 되어왔음을 이 전시회는 보여주었다. 일제강점 이후 재일한국인의 역사를 살펴볼때 한국인에 대한 민족적 편견이 유별난 일본땅에서 4백년간이나 한국의 성씨를 지키며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유지해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것은 조선도공들의 치열한 장인정신과 비록 강제로 끌려간 포로신세였지만 문화민족으로서의 품격을 잃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였을 것이다.

1598년 왜군에 의해 남원성이 함락되며 사쓰마 번주 시마스 요시히로에 의해 끌려간 조선도공 22성(性)-혹은 18성- 80여명이 큐슈 남단 사쓰마반도에 상륙했을 때 이들은 고국을 잃은 절망감과 풍랑과 굶주림, 그리고 왜병들의 총칼의 위협에 초죽음이 됐을 것이다. 조선의 다도해를 떠나 남지나해를 거치는 6백Km의 긴 항해는 가뜩이나 뱃길에 대한 공포증을 가졌던 조선도공들에게는 죽음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들이 처음 일본땅에서 접한 큐슈지방의 낙후한 문물에 대한 환멸은 역으로 조선인으로서의 문화적 자긍심을 부추켰을 것이다. 심수관가의 비장의 유물인 1대 심당길의 낡은 망건과 조선말 교본과 몇권의 언문소설, 그리고 심수관가 앞뜰엣 서있는 <반녀니><저ㅓ니> 등의 한글비 등은 이들 조선도공들의 4백년에 걸친 애절한 삶의 궤적을 말해 주었다. 조선도공들은 두고온 고향땅이 그리울수록 고향의 말씨와 고향의 옷, 심지어 고향의 음식이나 고향의 세시풍속까지는 그대로 지키고 살기를 고집했다. 박씨니 이씨니 심씨니 김씨니 하는 성을 지킴은 물론 자녀들의 혼사도 당연히 같은 도공들끼리 치뤄 혈통의 순수성을 지키고자 했다. 이런 일들이 고향을 등진 망국민들의 고국에 대한 의리의 표시요 도공으로서의 책무라 생각했을 것이다.

특히 주목할 일은 도공들이 일본에 끌려간지 7년만인 1605년 조선의 조상신인 단군을 모시기 위해 옥산궁을 세웠다는 것이다. 일본땅에 가마를 꾸미고 몇해를 지나며 이들은 타국땅의 낯선 풍토에 점차 적응하게 되자 고향에 대한 기억이 부지 중 흐려지는 사실에 스스로 놀랬을 것이다. 끝까지 조선도공으로 살아남겠다던 당초의 결의를 지켜나가기 위해 그들은 도공사회를 하나의 끈으로 묶어야 했으며, 그 정신적인 지주로 선택한 것이 바로 단군묘였다.

이같은 조선도공들의 몸부림이 오늘의 사쓰마야키나 아리타 가라쓰 야키가 살아남는 원동력이 되었음은 사실이지만 이와 함께 이곳 번주 시마쓰 요시히로의 조선도공에 대한 보호정책이 큰 몫을 해주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몇 갈래의 도공들 중 박평의를 중심으로 40여명은 끌려간 이듬해인 1599년 쿠시키노에 가마를 열고 조선식 옹기를 만들었는데 전쟁에서 돌아온 번주 야스히로는 1601년 김해 등에게는 우도에 관요를 열어주고 잇따라 박평의 등에게는 지금의 미야마인 나에시로가와에 역시 관요를 열게하니 이것이 나에시로가와 최초의 가마이다. 번주 야스히로의 대를 이은 아들 이에하사도 1620년 김해의 우도가마를 다테노 히야미즈로 옮겨주고 이들을 보호하니 이것이 다테노가마의 원조이며 이 가마를 그후 그의 아들 김화, 김림 형제에게 계승됐다. 이들 형제들이 아리타의 청자, 청화백자, 니시키테의 기법으로 받아들여 명치유신때까지 사쓰마야키의 명성을 지켜온 것은 조선도공의 역사에 특기할 일이다.

이처럼 몇 갈래로 흩어져 도자기를 굽던 조선도공들에게 농토를 분배하고 사족의 예우를 해주며 번주 이에하사는 이들이 구어낸 도자기로 다른 번과 국내교역을 벌여 많은 재화를 축적하니 조선도공들에 의한 사쓰마의 도예산업은 당시로서는 하이테크에 해당하는 높은 부가가치의 상품이었다.

따라서 조선도공들에게 도자기제조기술은 신분을 보장해주소 조선인으로서의 문화적 자긍심과 도공사회의 공동체적인 정체성을 보장해주는 담보가 됐다. 이제 조선도공들의 관심사는 조선도자기의 전수가 아니라 번주와 일본문화가 요구하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었으며 궁극적으로 사스마 특유의 세계적 도예문화를 창출해내는 것이 그들의 책무요 존재이유이기도 했다.

세월이 흐르며 조선도공 사회는 우리 말, 우리 옷, 우리 풍습 등 조선문화를 지키는데 한계에 직면하게 됐다. 도공 사회의 민족적 정체성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현지 일본인과의 혼인으로 현통의 보존이 어렵게 되고 지방정부의 사명에 따라 성마저 호시야마니 다하라니 하며 일본식 성씨로 바꿔야 했으니 가계를 통한 일본인과의 차별화마저 어렵게 됐다. 유독 심수관 일가만이 조선의 성씨를 지키며 15대 4백년을 버텨왔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기적이요 감동 바로 그것이었다.

4백년의 세월이 흐르며 나에시로가와의 조선도공촌에도 위기가 닥쳐왔다.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인한 페번치현정책으로 관요인 나에시로가와의 가마가 문을 닫게 된 것이다. 이때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번영의 도자기처를 12대 심수관에게 맡겨 운영케하였는데 1875년 12대 심수관이 사재를 털어 이를 인수하며 사쓰마야키는 3백년간의 번(藩)의 굴레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경영체켸를 구축하게 됐다. 그가 막부말 왕정초의 혼란기에 나에시로가와의 총수로서 근대 사쓰마댜키의 중흥조가 된 것은 일본도자기 산업사에서도 특기할 만한 일이다.

이무렵 12대 심수관의 활약은 눈부신 것이어서 투각, 부조 등 새로운 도자기 기법의 개발에 성공하는가 하면 1873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만국박람회에 대화병을 출품하며 유럽인들의 관심을 모으고 잇따라 미국, 러시아, 호주, 베트남 등 세계 각처에서 사쓰마야키의 명성을 떨치게 됐다. 일본 메이지 정부에서도 이같은 세계적 성가를 인정하여 1885년 12대 심수관에게 농상공부대신의 공로상과 1901년 녹수포장 등을 수여하니 사쓰마야키는 단순한 사쓰마지방의 도자기가 아니라 중앙정부가 담보하는 <사쓰마 웨어>로서 세계시장에서도 그 품격과 기술을 인정받는 명품이 됐다.

심수관가 14대의 가족사는 몇 가지 특이한 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중 1대 심당길부터 14대까지 공교롭게도 외아들로 가문의 명맥이 이어져왔다는 점이 특히 이채롭다. 단 하나뿐인 아들에게 오직 도예만을 전수하기 위해 13대에 걸친 심씨들이 만든 13개의 연결고리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도예를 향한 집념의 불길이었을 것이다. 역대의 아버지들이 외아들들에게 보여준 이 집념의 불길이야말로 도예 이외에는 무엇에든 손대거나 눈길조차 주어서는 안된다는 계율이요 전통이었다.

이처럼 조선에서는 천민에 불과했던 남원도공들이 일본에 끌려가 그 땅에 새로운 도자기문화를 꽃피웠던 한일도자기사는 바로 우리의 유이민사의 한가닥이다. 고구려의 담징이 나라 법륭사 벽화를 그리고 백제의 왕인이 일본에 문자를 전한 것이 고대한국유이민사라면 심수관가의 일본도자기 개척사는 중세유이민사이다. 그리고 이러한 한국유이민사는 근세로 이어지며 마치 한반도의 민들레꽃이 바람에 날려 바다를 건너고 그 땅에 새로운 민들레꽃밭을 이루듯이 일본의 재일한국인 사회를 이루고 LA의 한인타운을 이루며 또 한인독립운동기지를 형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가 꼭 유의할 점은 재일한국인사회나 LA한인타운 등이 형성되기까지 유이민들의 뼈아픈 절규와 고통이 얼마나 쌓여왔는지를 헤아리는 일이다. 북해도탄광에서 숨진 우리 징용자들의 절망의 한숨과 이민자들의 피땀과 또 동토 연해주의 눈보라 속에서 숨진 선구자들의 절규를 잊어서는 안되듯 4백년전 큐슈지방에 버려진 조선도공들의 절망과 비원을 헤아리는 일은 그리고 그들의 절망과 비원의 결실이 바로 오늘의 일본도자기의 꽃임을 깨닫는 일은 오늘의 우리 삶에 참으로 긴요하다. 한겨울 추위가 맵짤수록 새봄에 피는 꽃은 더욱 눈부시다.

* 김용옥 극본, 손진책 연출, 극단 미추의 연극 <그 불>의 팜플렛에 실린 일민문화재단 상임이사 이종석님의 글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