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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선조들이 애용해왔던 서민의 식기는 막사발이다?????????
2005-03-03 (목) 00:00 조회 : 1540

우리 선조들이 애용해왔던 서민의 식기는 막사발이다????????? 

이동명

우리 선조들이 애용해왔던 서민의 식기는 막사발이다????????? 막사발은 서민이 사용하는 그릇이기에 조선의 도공은 하루에 천여개를 만들정도로 숙연된 성형기술을 갖고 있었다. 이렇게 대량으로 제작하였기 때문에 우리의 도공은 무역무심의 경지에서 손가는데로 빚었다고 한는 견해도 있다.하지만 이런 설명의 잡기설은 조선사람들을 몽매한 존재로 인식시키기 위한 억지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있다. 나역시 서민들이 막쓰던 사발이였으면 왜 분청사기나 백자처럼 지금 이땅에 수많은 가마터가 발견되었는데 이도다완의 옛 가마터가 발견되지 않을까 ? 또한 굽높이가 유달리 높은데 그럼 사용하기 불편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기기도 하였다. 조선의 도자기에 밝은 '고야마 후지오'는 이도다완의 생산지가 경상남도 진주 근처라고 주장하였다. 해방후 우리나라에서도 이도다완의 생산지 찾기가 시작되어 진주서쪽의 '하동군 진교면 샘골마을'에 있는 가마터에서 이도와 매우 닮은 도자기 파편이 발견되었다. '이도다완의 고향발견'이라는 뉴스가 일본에서도 크게 보도되엇으나, 옛가마터에서 눈에 띈것은 약간 푸른기를 띤 아오이도(靑井戶)조각이었고, 문제의 오이도(大井戶)는 아니었다. 나또한 그릇을 만드지만 일반 서민들이 쓰는 밥그릇인데 굽이 그렇게 높게 만들어야 할 이유를 도대체 수긍하기가 힘들었다. 그런 궁금점을 가지고 있던 차에 소설가 정동주가 펴낸 '조선막사발,천년의비밀'(한길아트/1만5천원)은 세상의 시선 밖에 머물러 있던 그 막사발에 얽힌 의문들을 파고든 책이다. 나또한 전적으로 공감하는건 아니지만 많은 부분에서의 공감을 가지게 되었다. 우선 눈길을 끄는 대목이 '막사발과 이도차완은 전혀 다른 물건'이라는 주장. 지은이는 '막사발은 함부로 다루고 아무 음식이나 담아쓰던 서민들의 생활잡기를 이르는 것으로 19세기 이후 대량생산된 '막백자'가 그 주인공'이라고 설명한다. 16세기만해도 자기는 지배계층의 전유물이었고,굽이 높아 실용적이지 않으며 굽 언저리의 매화피문양도 생활자기에는 맞지않는다는 점을 들어 이도차완은 조선의 서민용 그릇이 아니었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 이도차완의 유래와 관련해 조선에서 기껏 서민들의 생활잡기에 불과했던 그릇을 일본인들이 미학적으로 재정립했다는,이른바 잡기설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한다. 잡기설은 조선사람들을 몽매한 존재로 인식시키기 위한 억지에 불과하다는 설명. 그렇다면 이도차완은 어디에 쓰던 물건일까. 지은이는 어느 한 시대를 풍미햇던 세속의 생활잡기가 아니라 시공을 뛰어넘어 깨달음에 이르고자한 승려들의 법물이라는 견해를 내놓는다. 그건 다름아닌 사찰 수행자들의 흙발우. 지은이는 물뿌린 땅에 발우를 놓거나 발우에 만다라를 장식하던 불가의 계율이 높은 굽과 굽 언저리의 물방울문양으로 체현됐다고 추정한다. 지은이는 이도차완의 순박한 외양과 신비한 비파색에서 꾸미지 않고 노리지 않는 미의식,무상(無常)의 이치,참된 깨달음에 이르고자 한 마음가짐을 발견해낸다. 이도차완 40점의 모습과 더불어 150여장의 컬러도판을 곁들여 이해를 돕는다. 사발의 형태에서 보듯이 힘찬 외형의 선과 빠른 속도 감에서 거친 듯 부드러운 그릇의 전체적인 기풍은 무기교의 그릇으로서 절제된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막사발은 임진왜란을 전후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인들 나름의 직관으로 그릇의 아름다움을 찾아 정호다완이란 이름으로 붙여져 오늘날 일본의 국보로 또한 일본 최고의 차그릇으로서 다인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는 일본 국보 26호인 기사에몽이도 다완이다. 이 다완은 일본다도의 명품중의 명품으로 다완의 정수로 다뤄질 만큼 그 자치가 매우 높은 다기로 그 소박하고 우아한 기품은 일본인의 마음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하며, 한편으로는 일본에서 면면히 전해져 내려온 우리 선조의 손길과 문화적 자긍심을 느낄 수 있는 훌륭한 다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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